두 개의 시선

2025. 08. 14. 목

by 개미철학가

#1

또 슬픔이, 내 앞에 앉았습니다.


그가 앉은 목재의자의 모서리는 세월에 많이 닳아있습니다. 그가 없을 땐 공허가 허공이, 그리고 긴 침묵의 시간만이 흐릅니다.

그의 공간은 늘 조용해서 방안에는 시계의 째깍소리 마저 침묵하고, 전자기기들이 내는 웅웅소리들과

벽너머에는 차가 지나가는 소리, 행인들이 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립니다.


그가 돌아오면 그는 오래된 목재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토하고, 잠시후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한 숨을 내뱉습니다.


그가 나를 울리면 나는 비로소 공명하고 깊은 침묵에서부터 쌓아올린 소리로 텅빈 공간을 채웁니다.

어느 겨울날 문득 그는 내 앞에 앉아 고요하게 눈물을 흘린적도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차가웠겠지만, 저는 그가 흘린 눈물 방울이 따뜻해서 덕분에 춥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나를 찾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행복하다는 것일지 모르는데,

그에게 슬픔이, 공허가 찾아오지 않은 것에 기뻐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를 찾아달라 애원해야 하는 걸까요. 적당한, 균형있는 관계란 늘 어렵습니다.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쓰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의지와 무관하게

일방적인 방식으로 상실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 2

어떤 물건을 사용하다보면 그 목적과 정체성과는 다르게 사용하기도 해요.

명상을 위해 구한 물건이 무언가를 담는 물건으로, 때로는 반려동물인 초원이의 물그릇으로..

필요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명상종은 명상종이에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나 역시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기가 어려워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아요.

생각과 실천은 다른 영역인가 봐요. 아니면 내가 마냥 게으른 걸까요.


명상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소품을 고를 때

다양한 물건 가운데 싱잉볼을 고른 까닭은

녹그릇을 닮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느껴지는 깊은 공허가, 허공이 좋아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공허와 허공은 제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명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아니라 비우는 것, 즉 무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에요.


싱잉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더니 먼지가 쌓이고 녹이 생겼어요. 먼지를 털어내고 녹을 한참을 닦고 또 닦아냈지만 지워지지 않네요.

살면서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또 그 물건을 가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었는데,

처음엔 그렇게 소중하고 애착이 가던 물건이었는데,


나는 물건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외면하기도, 그 필요가 사라지면 버리기도 해요.

최근 혼자의 시간에 생각을 하는 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거에요.

결론이라고 할지 내가 찾은 답은 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가 그것들이 내 안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 해요.


안타까운건 물건이던 사람이던

그것과의 이별을 고하는 시간이, 시점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마주선 상실의 시간을 응시하는 깊이와 길이는 서로 다른 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면 서글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