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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Jan 22. 2021

장기여행자의 사소한 이야기들





라트비아 케메리 습지





_여행하면서 늘어나는 것들.

바느질 기술.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투명인간 기술. 극한의 혼자 놀기 기술.


_여행하면서 사라지는 것들.

화, 욕심, 말, 미련, 통장 잔액.


_긴 여행에 지치지 않는 방법.

모든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의 리듬. 긴장과 여유, 안락함과 불편함, 외로움과 유대감.


_스스로 여행자로 느끼는 순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배낭을 메고 걷는데 명품 샵 쇼윈도에 그 모습이 비칠 때. 사방에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평원에 서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_완벽한 숙소의 조건.

개인 커튼을 칠 수 있는 다층 침대, 머리맡의 문어발 콘센트, 온수가 잘 나오고 선반이 있는 샤워실, 깔끔하고 있을 거 다 있는 주방, 빨래를 널 수 있는 난간이나 옥상.


_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날.

개인실을 잡은 날.



_돌아다니기 싫을 때 하는 일.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하기. 가끔 멋지게 입은 사람을 보면 그 옷을 입은 내 모습 상상하기. 



_가장 많이 듣는 말.

니하오.



_외국인을 놀라게 하는 손쉬운 방법.

치즈, 시리얼, 토스트, 계란후라이가 전부인 아침 주방에서 봉지 라면을 끓인다.



_한국인을 놀라게 하는 손쉬운 방법.

원래 유심을 사지 않고 인터넷 없이 여행한다고 말한다. 주머니에서 `아이리버 엠피-쓰리`를 꺼낸다.



_과한 호객 행위에서 벗어나는 방법.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급하게 이어폰을 꽂는다. 땅만 보고 실연당한 사람처럼 걷는다(하지만 경보 선수처럼 빠른 걸음으로). 영어를 모르는 척한다(‘No English’). 돈이 없다고 한다(‘No money’).


_여전히 실수하는 것들.

마트에서 일반 생수와 탄산수 구별. 읽을 수 없는 메뉴판에서 감으로 음식 고르기. 


_몸에서 절대 떼놓지 않는 것들.

카메라. 사진이 담긴 메모리카드. 여권. 체크카드.



_익숙하지만 여전히 귀찮은 일.

수수료 적은 현금 인출기 찾기. 미터기 쓰는 택시 잡기. 빨래.



_익숙하지만 여전히 곤란한 일.

남한과 북한 구별을 못 하는 국경 검문소 넘기. 내키지 않는 동행 거절하기. 


_피곤한 날 사치 부리는 법.

에어컨 있는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 먹기. 재즈바에서 홀로 테킬라 마시기. 음식점에서 요리 두 개 시키기(국물 있는 것과 국물 없는 것, 혹은 쌀로 만든 것과 고기가 들어간 것)



_가장 많이 먹는 음식.

조각 피자, 길거리 케밥, 모닝 크루아상, 계란 스크램블, 빵과 소시지만 있는 핫도그, 소스가 없어서 만든 기름 파스타, 햄 앤 치즈 토스트, 열량 보충용 쿠키, 코카콜라.



_가장 그리운 음식(외국에는 흔치 않은 요리).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육수에 담긴 면 요리(냉면, 밀면, 막국수, 냉모밀, 초계 국수, 김치말이 국수 등등).



_놀랍도록 알뜰해지는 순간.

다음날 국경을 넘는데, 그 나라 현금이 애매하게 남아있을 때.



_돈에 관해 바라는 것.

스스로 돈에 얽매이지 않는 것. 경제적인 문제로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


_세상이 좁다는 걸 느낀 순간.

어느 사막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이 친구의 사촌 동생인 걸 알았을 때.


_항상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느낀 순간.

어느 사막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이, `헤어진 이후에야` 친구의 사촌 동생인 걸 알았을 때.


_뿌듯함을 느끼는 순간.

삼만 걸음 걸은 날. 사진 천장 찍은 날. 이발소에서 머리 자른 날.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오고 싶은 곳을 찾은 날.



_죄책감을 느끼는 순간.

가난의 풍경이 호기심을 자아낼 때, 남의 불행한 일상에서 상대적인 안도감이 들 때.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볼 때.


_생각이 많아지는 순간.

야간 장거리 버스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삼각대를 펼쳐 놓고 옆에 앉아 해가 지길 기다릴 때.


_혼자라서 좋은 순간.

유명한 관광지가 끌리지 않아서 가지 않을 때. 새벽 일찍 일어나 텅 빈 거리를 걸을 때. 장소가 옮길 때마다 모든 여행이 초기화될 때. 외롭지만 위로받고 싶지 않을 때.


_함께이고 싶은 순간.

늦은 밤 분수대에서 뛰노는 사람들을 보는데, 혼자서는 옷이 젖는 용기를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 어떠한 방법으로도 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이름으로 불려지고 싶을 때.



_항상 하는 다짐.

세상에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많다고 믿는 것.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어릴 적 순수함과 솔직함을 잃지 않는 것. 늘 웃는 인상으로 살아가는 것.



_가장 그리운 것.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 것.



_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가족에게 늘 잘 지내는 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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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º사진 : 박성호

지은 책 : [바나나 그 다음,] [은둔형 여행인간]

공식홈페이지 : www.antsungho.com

인스타그램 : @ant.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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