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쎄미 Jun 05. 2020

그래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안 해! 안 한다고!

휴대용 삼각대를 사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셀카 구도에서 벗어나 마치 누군가 찍어준 듯한 사진을 눈치 보지 않고 여러 번 찍을 수 있으니 결과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 잘 나온 사진들이 메모리 칩 안에만 잠자고 있는 것이 아까워서 포토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굳이 사진을 한 장 한 장 인화하지 않고도 훌륭한 앨범이 뚝딱 만들어지니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포토북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동행에게 선물하기에도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라 이만한 여행 후기도 없다고 생각하며 매번 뿌듯했다.


하지만 왜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되는 걸까.


나의 가장 빈번한 여행 메이트는 가족들이다. 그만큼 포토북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한다.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너무 잘 만들었다고 해주더니 나중에는 점차 말이 많아졌다.


"이 사진은 왜 안 넣었어?"

"이 사진은 빼지."

"장소도 좀 더 자세하게 써줘~"


칭찬보다 불만을 더 많이 듣는 순간 재미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선언했다.


"나 이제 안 만들 거야."


몇 번의 여행을 다녀와도 신작이 나오지 않자 가족들이 재촉했다.


"난 이제 안 해. 만들고 싶은 사람이 직접 만들어."


재미로 시작했는데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만둔다고 선언하고 나서도 '그래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만들어줘'라는 말을 들었다. 가정은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라더니. 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몰아준다는 말이 집 안에서도 해당된다. (누구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못하니 휴직을 선언하고 2년 정도가 지났다. 컴퓨터 메모리를 정리하다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여행사진들을 봤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모든 사진들이 소중하고 예뻤다. 역시 바깥으로 꺼내놓아 보관해야겠다. 그날 밤 충동적으로 3권의 포토북을 만들었다. 만들다 보니 또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 버렸다. 맞아.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입금을 마쳤으니 곧 집으로 배송이 올 것이다.

가족들도 불만 없이 깨끗했던 초심을 되찾아야 할 텐데.


이제 더 늘어나겠죠.


P.S. 결국 해본 사람이 다시 하고 있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양고기 첩보 작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