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형태를 빌려

잘 지내고 계신가요.

by 세미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나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 읽어본 책을 몇 권 읽고, 읽었던 책도 다시 몇 권 읽고. 사람들을 적당히 만나고 잔병치레는 조금 있었지만 크게 병원 갈 일도 없었으니 잘 지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을 꼽아보자면 편지를 써본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의 빚으로 묵혀두었던 어떤 일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 분과 연락이 닿아 그 빚을 청산하고자 편지를 썼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설명드리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그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크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 일은 충분히 살아오신 어른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게 뭐? 할 정도의 아주 작은 일이었고 특히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쁘게 지내시는 그분께는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만 저에게는 가끔 꿈에도 나올 정도의 묵직한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말씀드려야지 드려야지 하면서 속절없이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우연찮게 기회가 온 것이었습니다. 이 만남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기쁨의 재회를 해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공손하고 효과적으로 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쓴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 자 한 자를 고심해서 골랐습니다. 몇 번을 고쳐 썼는지 모릅니다.


너무 길어서도 안되고 너무 가벼워서도, 그렇다고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되는 아주 어려운 편지였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었나요. 사랑 고백도 아닌데 말이죠. 지하철 안에서도 자기 전에도 잠시 커피를 마실 때도 내내 그 편지 내용을 생각했습니다. 며칠에 걸쳐 겨우 내용을 정하고 나니 손글씨로 옮기는 큰일이 남아있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듯 컴퓨터 키보드에 익숙해져 있는 저는 이미 손글씨가 망가져있었거든요. 하지만 자판으로 쓴 편지는 순식간에 잉크가 말라가는 것처럼 왠지 편지의 온도도 함께 차가워질 것 같았습니다.


망칠 것을 대비해 연습용 편지지까지 넉넉하게 산 저는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연세 드신 분이니 글자를 흘려써서도 크기가 너무 작아서도 안되었습니다. 수정 테이프를 쓰는 일도 없어야 했습니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어찌나 손에 힘을 줬는지 겨우 한 장 남짓의 편지 쓰기가 끝나자 손이 달달 떨릴 정도였습니다.


최대한 정갈하게 편지지를 삼등분으로 접고 봉투 안에 넣어 잘 갈무리했을 무렵에는 얼마나 설렜는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가볍고 흐뭇하게 보아주시길 바랐습니다.


예상대로 그분께서는 기억도 못하시는 지난날이었습니다. 혹은 못난 제자를 위해 기억 못 하는 척해주신 걸까요. 재회 이후 한번 더 이어진 만남에서 그저 허허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날 밤 얼마나 달게 잤는지 모르실 겁니다.


저는 그 해피엔딩이 직접 쓴 편지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께도 편지를 쓰고 싶어진 것입니다. 편지의 형태를 빌려서라면 안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회신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처럼 이 편지도 사실은 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께서는 한 장의 짤막한 엽서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그저 가볍고 흐뭇하게 보아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예, 저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 당신께 편지를 쓰는 날이 더해진다면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남는 책을 발견했을 때나 얼마 전처럼 달이 유난히 크고 예쁠 때, 혹은 따뜻하고 귀여운 것들을 안아봤을 때 그런 작은 날들에 기쁠 때면 당신께도 그 온기를 전해드렸으면 합니다. 그럼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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