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이라는 착각

#1-1

by 개미애비

평범한 일상이었다. 무더위가 막 지나간 햇살 좋은 여름의 끄트머리였다. 동네 산책로를 따라 죽 늘어선 가로수는 여전히 푸른색으로 싱그럽게 물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해 여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되돌아보면, 가벼운 차림으로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들고 동네 곳곳을 누비기에 부족함 없는 계절이었다.


개학, 그러니까 2학기 정식 출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나는 늦은 오전까지 퍼질러 자는 것으로 개학 전 마지막 주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는 평일에 못 잔 잠을 주말에 몰아서 자곤 했다. 아내는 주말 오전에 나를 중요한 용건 없이 깨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아내가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오빠.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개미 열이 안 떨어지네.”


며칠간 아이의 체온이 38도를 넘나들었다. 당시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자주 열이 오른다고 하니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 동안 열이 오르는 때에 맞추어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면서 열이 내리길 기다리던 참이었다.


때마침 내게 코로나19 의심 증상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코로나19에 전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만약 아이가 코로나19에 전염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보를 찾아보는 정도의 대비만 해둔 터였다. 하지만 아이의 열은 며칠이 지난 그날까지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들쑥날쑥한 양상을 보였다.


나는 병원에 가보자는 아내의 의견에 즉시 동의하지는 않았다. 엄청난 고열이 아니기도 했고, 정황상 단순 코로나19인 것 같기도 했으며, 가뜩이나 주말이라 문을 연 병원도 많이 없었기에 힘들게 갓난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이 유난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기는 했다. 고열이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고 잔잔하게, 며칠이나 지속되기는 했으니까. 나는 마지못해 아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나는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늘 다니던 동네 병원이 주말에는 언제까지 문을 여는지 급히 검색했다. 다행히 그 병원이 토요일 늦은 오후 언저리까지는 문을 연다는 정보를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었다. 기저귀와 분유, 당장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서 유모차에 실었다. 병원은 가까워서 차로 가기에는 애매한 거리에 있었다.


주말의 동네 병원 대기실은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거의 놀이터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심지어 병원 대기실에는 각종 놀거리가 잔뜩 비치된 놀이 공간이 딸려 있었다. 나는 수차례 그 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 장소를 그날 처음 보았다. 일부 아이들은 아픈 것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대기실과 그 옆에 딸린 공간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병원 안에 저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진료실이나 하나 더 만들 것이지.


나는 유모차를 밀면서 속으로 불평했다.


진료실 앞은 대기하는 부모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그늘진 얼굴이었다. 아마 우리 얼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겨우 소파의 빈자리를 찾아 옆 가족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소파에 앉으니 아픈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가득 찬 대기실 풍경이 한눈에 그득히 들어왔다. 우리나라에 저출산이 화두라더니. 이 동네의 주말 병원만큼은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잠이 부족했던 나는 속으로 재차 투덜거렸다. 우리는 미리 진료 예약을 하지 않고 내원했다. 그 덕에 우리의 대기 시간도 뜨거운 땡볕 아래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숨 막히던 대기실이 널널해질 즘에서야 겨우 의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가 거의 마지막 환자인 듯했다. 그날 당직을 섰던 의사는 한두 번 진료를 본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의사였다. 그 병원에는 소아과 의사가 여럿 있었고, 우리는 전부터 그 의사를 아이의 주치의 비슷하게 여겼다.


의사는 간결하게 문진했다. 그는 일단 아이의 소변을 받아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덧붙였다.


아이를 안고 다시 대기실로 나왔다. 진료실 문 앞에 서 있던 간호사가 소변 패치를 가지고 우리 쪽으로 왔다. 간호사가 아이에게 소변 패치를 붙이고는, 아이가 소변을 보면 그것을 떼서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소변이 부착한 패치에 모이지 않고 번번이 옆으로 샌 것이었다. 두어 번 패치를 다시 붙였는데, 나중에는 아이가 소변을 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병원 마감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소변 검사 담당자는 검사 결과가 나오면 퇴근 시간이 임박한다는 이유로 검사를 거부했다. 후에 사정을 들은 의사가 우리를 보며 굉장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는 끝까지 아이를 봐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의사는 차선책을 제시했다. 그 병원에서 거리가 얼마간 떨어져 있는 우리 지역의 종합병원 응급실로 내원해서 마저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이 쉽지 않았다. 곧 아이에게 분유를 먹여야 할 시간이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큰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결과를 모르면 찝찝하니까 아무래도 가서 확실하게 확인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의사는 고열의 원인으로는 역시 요로 감염이 가장 의심된다고 말했다. 나는 요로 감염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질병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아무튼, 처음 간 동네 병원에서는 진료를 끝까지 받지 못했다. 한참 동안 기다리기만 하다가 겨우 의사를 만난 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로 오지 말고 바로 그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날따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더 삐딱하게 보였다. 아이가 요로 감염에 걸린 것이든, 기나긴 기다림 끝에 아무 소득 없이 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이든, 우리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사실은 매한가지였다.


아내는 유모차에 실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힘없이, 그러나 단단하게. 마치 이 불행이 더 빨리 병원으로 오지 못한 자신의 책임인 듯 마음 쓰는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 아내 얼굴을 보았다. 그늘이 짙게 드리운 아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곧 아이 밥시간이라 마음도 급했다. 그렇게 두 번째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종합병원 응급실은 입구부터 혼란스러웠다. 흡사 작은 전투가 펼쳐지고 있는 전쟁터 같았다. 아마 주말이고 곧 저녁이라 사람이 더 미어터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쁘게 내 앞을 오가는 의료진의 표정 없는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응급실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인구가 50만 명에 육박하는 우리 지역에 달랑 하나 있는 24시간 소아 응급실이 이 병원에 속해 있었다. 우리처럼 그 병원에서 이쪽으로 떠밀려 온 아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리라.


“두 분 중 한 명만 같이 들어올 수 있어요. 어느 분이 들어오실래요?”


무표정 의료진이 선택지를 던졌다. ‘나와 아내 둘 중 누가 더 훌륭한 보호자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정답은, 대체로 나보다는 아내 쪽이었다. 나는 대변 처리에 특화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나는 대기실에서 두 사람의 소식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온종일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응급실에서도 비슷한 검사를 한다고 했다. 아이의 피를 뽑고 소변을 받아 제출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는 저녁을 지나서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 콩나물시루 같던 대기실에 빈자리가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조심스레 낙관할까 말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동이 울렸다. 아내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입원해야 한대. 하…….”


우리는 의료진으로부터 며칠간 입원 생활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직도 해야 할 검사가 많이 남은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와 아내는 지쳐 있었다. 우리 둘 다 병동에 있을 상태도 아니었고, 병원 규정상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코로나19 이후로 대부분의 병원이 입원 시 1명의 상주 보호자만 허용했고, 이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내와 하루씩 번갈아 교대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아내가 먼저 아이 곁을 지켰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당장 입원에 필요한 물건들을 캐리어에 담아서 아내에게 전해준 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운전하는 와중에 나는 다음 주 출근 걱정을 하다가, 동네 병원 의사가 흘려 말했던 ‘요로 감염’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여러 번 떠올렸다.


요로 감염.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들렸던 그 병명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거대한 파장이 되어 돌아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전 01화터널 초입에 세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