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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앤트 Apr 30. 2024

석고소묘 만능설

성역화

장르의 효율성과 기본기는 서로 다른 영역이다.


석고 소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석고 소묘는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장르로 여겨지기도 한다.

석고 소묘는 미술을 시작할 때부터 꽤 오래 그려왔고, 한때는 나의 그림의 기반이자 전부였다. 완성작이 1000장 정도. 연습했던 것은 그 이상이 될 정도다.


입시 과목으로 석고소묘를 접하다 보니 기본적인 원리를 잘 모른 채로 그린 기간이 길다. 당시에는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서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당금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단순한 접근으로 그림을 그렸었다. 

빛과 구조의 세부적인 개념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특정한 패턴에만 적응했다. 빛 방향을 한쪽으로 몰아 대비를 강하게 주고 입체감을 위해 질감이 무너지는 강하기만 한 그림이었다. 


연필에 대한 숙련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원리에서 벗어나는 불필요한 터치와 습관적인 처리 방식들에 맛 들렸다. 석고소묘의 룰이자 연필의 맛이라고 착각하며 그림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근거 부족한 표현들을 느낌으로 덮으며 얼버무렸다.


석고 소묘 만능설에 대해서 굉장히 공감했었다. 석고 소묘가 답이고 무조건 해야 되는 그림의 기본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같은 소묘여도 다른 소재를 다룬 연필화를 보면 그대로 따라 그린 그림. 사진처럼 그리는 그림. 베껴 그리는 그림으로 인식했다. 그런 개념으로 극사실화를 굉장히 싫어했다. 석고소묘처럼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깊은 그림이 된다는 착각이었다.

 

석고를 다양한 관점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빛을 조절하여 밝게도 그려보고 느낌을 변형하여 감각적인 표현 방식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사실적으로도 그려보고 드로잉을 섞는 등 나름의 파격적인 시도였다. 석고 소묘를 다양한 버전으로 소화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잘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듣고 보고 배울 때 주변에서 입을 모아 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석고 소묘를 접하지 못했던 경우에도 소묘에 대한 로망이나 갈망이 담겨 아쉬움을 담아 얘기하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입시가 끝난 상태에서도 석고 소묘를 꽤 오래 붙잡고 연습했다. 이 자체가 기본이라는 생각을 넘어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석고에 익숙해졌을 무렵 기본기가 정말 탄탄하게 갖춰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재료와 장르 변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다,

수채화, 아크릴, 유화. 일러스트, 원화, 디자인. 재료와 장르를 바꿀 때마다 상상 이상으로 무너지는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묘를 잘하면 다 잘할 수 있다는 항간의 얘기와 믿음이 와르르 무너지며 스스로에게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생각의 끝 지점이 항상 재능으로 향하며 좌절한 경험은 수천번도 넘는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극복할 수 있었고 뒤늦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경험에 의한 깨달음은 항상 반박자 늦게 느껴진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27.2x37.2cm, 도화지에 연필, 2018




석고소묘는 미술의 한 장르다.

기본기를 익힐 수 있는 필수 관문처럼 여겨졌지만, 특정한 소재를 놓고 그리는 정물화 장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조각상을 본떠 만든 석고상은 소재가 석고로 하얗고 매끈하다. 대부분 두상부터 흉상까지의 구조를 담고 있으며 시선을 빼앗을 만한 색과 무늬가 빠져있는 소재다. 이런 특성이 있기에 빚과 구조를 익혀나가기 적합한 소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무도 다양한 소재들이 있다. 색, 질감, 무늬, 형태. 모두 다르다. 이 대상들에 빛과 시점을 조절하며 평면공간에 연출을 계획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3차원 공간을 표현에 담을 수도 있고 평면에만 존재하는 2차원 표현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재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들을 활용하여 고유의 느낌을 구축할 수도 있다. 선택지를 나눌 수 있고 병합하는 과정에서 그림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조금씩 만들어진다. 이것이 그림의 기본기라고 부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단순히 석고 소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장르를 다루면서 느낀점은 소묘가 운동으로 비유했을 때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듯이, 소묘는 그림에 대한 끈기와 체력을 전체적인 신경을 골고루 발달시키기 좋은 장르다. 하지만 마라톤을 잘하는 것과 별개로 구기종목, 투기종목, 스피드종목 등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가 된다. 장르를 잘 소화하려면 장르마다 효율적으로 적용될만한 룰을 파악하고 진행해야 한다. 

한 방향에 성취가 높아도 넘기 힘든 벽은 늘 존재한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37.2x27.2cm, 도화지에 연필, 2019




·정리

석고는 소묘를 할 수 있는 소재 중 하나일 뿐이다.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석고뿐만 아니라 다른 소재들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수채화. 유화. 아크릴. 디지털 등 재료와도 상관없다.

다른 장르인 만화, 원화, 일러스트, 디자인도 접근 방식에 따라 그림의 기초. 장르의 기초. 두 가지를 나누어 채워 나갈 수 있다. 


한 장르. 소재. 재료가 그림을 대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도기에서 오는 좁은 시각이다. 


석고 소묘 만능설은 경험상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림은 특정한 소재. 방법. 장르. 재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도의 영향력으로 완성된다. 

이해도를 장르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하며 장르에 최적화된 재료를 선별하고, 재료를 다를 수 있는 숙련도가 연습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이 개념을 모를 때는 장르와 재료 변환이 너무 힘겨웠다. 이 방식을 통해 효율을 최대한으로 높여 성장할 수 있다.


성장은 결정의 연속이다. 한쪽에 치우친 결정은 도박과 같아 결국 마이너스로 빠질 수 없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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