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를 이용한 그림
정확도를 올리려면 제도의 방식을 차용해야 한다.
어느 날은 그림이 잘 그려지고, 어느 날은 그림이 안 그려지고, 당일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한 경우들이 많다. 나 역시 단순히 기분이나 컨디션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잘 그려지는 날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처럼 수월하게 진행되기도 하고, 안 그려지는 날에는 잘 되던 부분도 풀리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기복이 심한 상태에서 나온 결과물이 본인에게는 들쭉날쭉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늘 그려오던 수준으로 보일 확률이 높다.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현재 나의 실력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뜻과 같다.
기준이 없으면 기복이 생긴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느 날에는 왠지 모르게 잘 되고, 어느 날에는 왠지 모르게 안 되는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 없다. '기준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느낌대로 가겠다.' '예술은 나를 표현하는 거야,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겠다.'라는 생각으로 기준 없는 기복이 반복되다 보면 크게 무너지는 시기가 온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객관성을 잃게 되며, 주관적인 성향으로 점점 변해 자기 안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래도 성공한 경우들이 있다. 우리 주변 어딘가에는 복권에 당첨된 경우들이 있듯이, 기준점이 없는데 느낌만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가진다. 아무나 얻을 수 없는 타고난 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10명 중 최소 6명 이상 효과를 볼 수 있는, 확률 높고 안정성을 지닌 방법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제도다.
제도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영어로는 테크니컬 드로잉이고 미술 용어로 봤을때 보다 완화된 느낌이 든다. 제도는 어떤 규격에 맞춰서 정확하고 간단명료하게 도면을 작성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정확함에 주목해야 한다. 이 테크니컬드로잉은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제품이나 건물, 설비, 자동차 등 안전성과 내구성을 꼭 갖춰야 하는 요소들에 적용되는 드로잉이다. 안전에 관련된 만큼 높은 디테일이 필요하고 완벽한 정확도를 가져야 한다.
흔히 헷갈릴 수 있는 제도와 설계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비슷한 느낌이어서 혼동이 올 수 있지만, 제도는 기능이고 설계는 디자인이다.
기능은 기술상의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제도의 가장 큰 목적은 정확성이다. 디자인은 콘셉트를 설정하고 계획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며, 이 두 가지 요소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설계가 나오면 제도를 한다.
회화는 보통 설계에서 끝나는 경향이 있다. 콘셉트 안에서 느낌에 의존한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방향이다.
회화에서도 설계를 다음 제도까지 진행하는 것이 좋다. 나만의 노하우는 이 과정 다음 설계를 한 번 더 추가하며 마무리한다. 조금 복잡할 수 있으니 정리해 본다.
1. 콘셉트와 계획을 잡는다.
2. 제도를 차용해 표현의 정확성을 갖춘다.
3. 정확성 위에 다시 콘셉트와 계획에 맞는 느낌 표현을 올려준다.
콘셉트와 계획은 주관성에 가깝고 제도는 객관성에 가깝다. 주관성 위에 객관성을 올리게 되면 정확도를 갖추게 되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갖춰놓은 정확도 위에 한 번 더 주관적인 생각과 표현을 올려주는 방식이 된다. 기존 회화 방식은 주관성-주관성의 연결로 느낌의 비중이 커서 기복이 심한 방식이다. 제도를 추가한 방식은 주관성-객관성의 연결로 정확도가 높아지지만, 표현이 경직되며 장르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 점을 개선한 주관성-객관성-주관성의 연결 방식은 정확도와 느낌까지 모두 갖출 수 있는 체계적인 과정이 된다.
객관성과 주관성의 비율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 포인트다.
제도는 객관성이 높은 방법으로 수치상 모두 맞아떨어져야 하는 드로잉이다. 회화 그림에 적용할 때는 알맞게 변환시켜야 한다. 자로 재면서 그리거나 그리드 기법을 사용해 칸을 쳐서 그리는 것은 대상에 끌려다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비례와 비율의 기준점을 두고 그리는 계측법을 사용한다. 이 기준점에 익숙해지는 순간 계측법이 목측법으로 바뀌는 경험을 할 수가 있다.
눈대중은 기준 없이 대충 느낌대로 그리는 방법이다. 목측법은 계측을 하는 도구를 눈으로 바꾸어 비율과 비례로 면적을 만들어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이런 방향 설정으로 정확성을 유지하며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게 된다.
제도는 대상에 끌려다니기보다 끌어당길 수 있는 방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