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이해도
잘한다는 것은 상대적 관점이 더 크게 작용한다.
무언가 잘한다는 것의 기능적인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뒷받침되는 근거가 충분할 때 그 기능이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조건이 갖춰진 상태라면 분명 나름의 체계적인 과정이 있을 것이고, 과정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하고 생각한 시간이 굉장히 길다는 것이다. 체계화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인지하지 못해도,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절대 무시할 수 없으며 꼭 존중받아야 한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장르 이해도의 부족이다.
미술을 하며 장르와 재료를 많이 바꿔 가는 과정에서 텃세를 꽤 많이 경험했다. 장르마다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섣불리 단정 짓는 경우도 많이 봤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적어본다.
소묘를 했으니 색을 못 다룰 것이다. 수채화는 가벼우며 유화가 그림의 꽃이다. 한 컷 표현이 아닌 만화처럼 여러 장면을 그려야 창의적이다. 회화처럼 자료를 보고 베껴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만화는 디자인이 체계적이지 않고 마음대로 그린다. 추상은 생각나는 대로, 느낌대로 그려서 편하다. 원화는 모든 요소가 담긴 그림의 정점이다. 등 같은 미술 카테고리 안에 있음에도 서로의 영역을 성역화하여 최고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편 가르기 하는 공간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굉장히 피곤해진다.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부분은 이해가 가지만, 편을 가르는 것은 굉장히 좁은 시야를 가진 경우들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분야가 특별하고 진입장벽이 높아 아무나 못 하는 것처럼 포장해서, 초보들에게 자존감과 프라이드를 챙기는 경우들이 많다.
누구나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편견에 사로잡혀 섣부르게 판단된 적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 단정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경우 중 하나다.
미숙한 능력치로 전선에 뛰어들어서 상업활동을 한다면 당연히 다양한 의견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숙하기 때문에 그 점을 깨닫고 연습하거나 배우러 다니는 와중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곳은 정말 잘못된 환경이다.
여러 장르에 대한 경험치는 이해도를 높여준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그림을 배우러 갔다. 일반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벽을 최소한 한두 번 이상 넘어봤다는 얘기와 같다. 벽을 넘었다는 것은 멘탈적으로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고 자기만의 노하우들이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피아노의 개념으로 그림에 접근하면 당연히 적용이 안 되며 잘 안 그려질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선생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 '피아노랑 그림은 역시 다르죠?' '피아노처럼 쉽지 않죠?' '그림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온다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순간적으로 설득되고 멘탈이 흔들릴 수 있다. 단지 장르가 다를 뿐인데, 나름대로 해오면서 쌓아놓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무시당하여 황당한 마음과 그래도 선생님 반응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이 겹치며, 자신감을 잃고 미술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으로 흘러간다. 미지의 분야에서는 이런 상황이 꽤 흔하게 발생하며, 나의 성장 과정에서도 무수히 많이 일어났던 일이다. 굉장히 운이 없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운이 부족하면 결단력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제대로 된 선생님의 역할은, 학생이 피아노를 잘 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경험치들을 이용하여 그림으로 변환시켜 주는 것이다. 다른 장르에서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높은 효율이 나오는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로 공통점을 찾아 변환 방식들을 제시한다.
실제 사례로, 간단한 도구 사용법과 그리는 순서 정도만 확실히 정리해 주어도 전공자보다 더 뛰어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고 평균치보다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찾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앞서 있는 것은 미술에 대한 경험치일 뿐이지, 삶이나 다른 영역들에서 학생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 분야에 오래 있으며 자부심이 큰 경우에는 이런 부분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학생들이 피해 보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정리
능력을 앞세워 누르는 곳이 아닌 장점을 발견해 끌어낼 수 있는 교육을 접해야, 마음이 상하지 않고 원하는 목적까지 다가갈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능력들, 공부, 운동, 음악 등뿐만 아니라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모두 유용하다. 오래 앉아있기, 정리 정돈, 메모하기, 수집하기 등등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 특정한 성향으로 카테고리가 형성된다. 섬세함, 과감함, 진중함, 활발함 등 큰 카테고리 성향에 맞게 커리큘럼을 적용해 나가면 미술에 관련된 숨겨져 있는 능력까지 충분히 끌어낼 수 있다.
모든 능력에는 의외의 잠재력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