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피로도

익숙함

by 김앤트

힘들다는 감정에서 정신적 피로도는 조금 더 세분화된다.


정신적 피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회피성 감정에 가까울 때가 많다. 벽에 부딪혔거나 맞닥뜨렸을 때, 생각하고 고민할 때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진다.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데 좀 꺼려지고, 그냥 하기 싫어지며 보기도 싫어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버리고 싶은 감정들이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힘들다는 생각과 감정이 커진다.

그림을 그릴 때 꼭 지키면 좋은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하나하나 지켜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적 피로도가 누적되고 점점 대충 하게 될 때가 있다. '모르겠다.' '그냥 이쯤에 감으로 이렇게 그려야지.' 머리가 편한 방향을 찾곤 한다.

수업하다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런 장면들이 자주 포착되곤 한다. 학생의 정신적인 피로도가 꽤 많이 쌓여있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은, 시야가 좁아지면서 생각이 저 멀리 날아가 있는 듯한 자세에서 드러난다. 스스로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인식을 잘 못하며 자료에 끌려다니는 상태가 된다.


그림은 머리로 먼저 만들고 손으로 그린다.


나도 예전에 그림 연습할 때 자주 겪은 부분으로 그게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 느낌인지 정확히 안다. 당시에는 몰랐었지만, 성장통을 오래 겪어보고 시간이 한참 지나니 확실히 정리되는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누구나 낯선 장르였을 미술이다. 점차 익혀가는 과정을 예로 들면 굉장히 복잡한 수학 공식을 만났을 때와 비슷하다.

방정식까지 배워서 조금 적용이 되기 시작할 무렵 함수를 배운다. 로그로 금방 넘어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미적분에 미분법까지 진행되며 머리가 하얘진다. 용어도 어려워서 의욕을 갖고 덤벼도 모르겠고 어려우니 정신적 피로도가 쌓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언어를 접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지만, 개인 유튜브 영상 번역 작업을 하려고 번역기만 켜도 벌써 피로하다. 모르는 언어들 인도네시아, 프랑스, 독일어 등 제대로 알지 못하니 보기만 해도 그냥 헛웃음 나오고 멍해진다. 멍해짐은 피로도를 초월해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다. 정신이 날아간 순간 잠시 기절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많이 겪는 문제다. 방 탈출을 가서 문제를 잘 풀다가 갑자기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서, 아는 패턴에 하나도 안 걸리며 시간이 촉박할 때가 있다. 이 순간 또 멍해지며 전화기 앞으로 걸어가 매니저에게 질문을 하기 위한 상황 설명을 하는데, 설명도 잘 안되면서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매니저도 같이 멍때릴 때가 있다. 둘이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대치하고 있게 된다. 이것은 모두 정신적인 피로도에 대한 얘기다.


쉴스수채화.jpg 김앤트, 오라, 4000x3000 PX, digitizer, 2017


복잡하고, 헷갈리고, 피곤하고, 짜증 나고, 어려움을 풀어내지 못하는 상황들이 그림 연습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온다.

침착하게 바꿔서 생각해 보면, 더하기 곱하기를 하다가 정신 피로도가 극한까지 쌓이는 경우는 드물다.

영상에 외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자막을 달다가 정신이 도망가 버리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결국 이렇게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체계 안에서는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피로도가 비교적 쌓이지 않는다. 대부분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잘 안 풀리고 어렵기 시작하며 피로도가 쌓인다. 이렇게 정신적인 피로도가 왜 쌓이는지 간단한 예시들로 설명했다.


답은 익숙함으로 정해져 있다.


아무리 복잡한 미로들도 하나하나 천천히 따라가다 막혀서 되돌아오는 일도 빈번하겠지만, 시간을 두고 계속 풀다 보면 결국에 풀리게 된다.

그림도 똑같다. 그림을 그리다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대충 그리게 되는 순간 그 지점에 세이브 포인트가 생긴다. 세이브 포인트에서는 항상 같은 피로도가 발생하게 된다. 회피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모든 과정에서 항상 막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초반 계획이나 형태, 형태에서 넘어가는 지점과 명암 또는 색, 질감이나 마무리 과정 등 현재 못 풀어내고 있는 지점이 있다. 꽤 오래 지속되었다면 항상 그 지점에서 회피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풀어내지 않으면 어차피 다음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부분이 어디인지 자가 진단을 통해 찾아내고 시간을 오래 투자해 집중적으로 풀어봐야 한다.

피로하다면 다른 것은 안 해도 좋으니, 막히는 과정만 우선순위를 두어 풀어놓는다면 같은 일이 반복돼도 회피성이 줄어들게 된다.

그림에 대한 피로도를 줄여나가며 익숙해졌을 때 한 단계 성장 가능성이 찾아온다.


시간 투자는 익숙함을 가져오고 익숙함은 피로도를 줄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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