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에 감명 깊게 읽고 내 기본기의 시작점이 된 책이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영감을 얻었기에 스토리를 간단히 각색해서 요약해 본다.
이 책에는 천하제일 고수가 나오며, 요즘 시대로 따지면 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소문을 듣고 온 수많은 영재를 제자로 받았는데, 훈련 방식이 너무 평범했다. 천하에서 제일 강한 고수가 알려주는 방식이, 주먹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지르기의 반복, 양동이 두 개 들고 시냇가에서 물 길어 오기, 운동장에서 양반다리 하고 명상하기 등. 단순한 방법들을 일 년 내내 반복해서 시키자, 모두 실망하고 떠나는 와중에 단 한 명이 남았다. 동기들이 같이 떠나자고 설득했지만, 끝까지 해볼 생각으로 남은 한 명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몇 년 동안 아주 간단하면서 끈기가 필요한 훈련을 반복한 후 세상에 나가게 된다.
세상은 살얼음판이며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고수들이 쓰는 기술들은 매우 화려하다. 칼 한번 휘두르면 매화 벚꽃이 휘날리고, 찌르기는 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거나, 보기만 해도 숨이 멎는 살기를 풍기기도 한다. 누가 봐도 못 이길 것 같은 범상치 않은 강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들과 비교하면 주인공은 평범하고, 싸우게 되면 처참하게 질 것 같은 느낌이다. 전쟁터에 들어가 화려하고, 강렬하며 매서운 공격을 계속 받게 되는데, 평범한 주먹 지르기 하나로 모든 기술을 와해시키며 승리하게 된다. 하루에 수천 번씩 연습했던 단순한 주먹 지르기가 모든 화려한 스타일을 잡아먹듯 압도한다.
그곳의 모두가 지르기 연습은 많이 해봤을 것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대다수는 기본기를 마스터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다음 단계로 다른 기술을 익히고 스타일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천하제일 고수의 커리큘럼에 따라 우직하게 기본기만 끝없이 추구하게 되고, 그 기본기 하나만으로도 어떤 화려한 기술이든 다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 내용을 많이 간추렸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연습해서 천하제일 고수가 되는 내용이다.
김앤트, 연구, 27.2x27.2cm, 도화지에 연필, 2010
그림 연습 1~2년 차에 석고상을 500작 이상 그리며 기본기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했다. 주변 모두가 그러하듯 다음 단계로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기본기라는 것이 어떤 소재와 장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정육면체를 그려봤다.' '구를 그려봤다.' '아그리파를 그려봤다.' '소묘를 해봤다.' '수채화를 해봤다.' '형태를 잡을 수 있고, 명암을 넣을 수 있고, 색을 넣고, 창작한다.' 등의 기준이 아니라 그림의 기본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래 고민하게 되었다.
스스로 의문이 들어 석고상을 내려놓거나, 뒤로 돌려놓는 등 평소와 다른 각도로 다양하게 바꿔가며 그리기 시작했다. 늘 그려오던 소재가 이상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그리던 익숙한 환경과 세팅에서 조금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본기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었고, 단순히 숙련도가 높아진 것뿐이었음을 알게 됐다.
기본기에 요소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하나하나 적용하면서 다시 그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평범한 주먹 지르기처럼 가장 평범한 장르와 표현을, 다른 관점으로 다른 해석들이 적용될 수 있게 계속 바꿔나갔다. 스타일이나 그림체가 1순위는 아니었다. 스타일은 높은 기본기를 갖게 되면 요소마다 자연스러운 강약 조절로 얹을 수 있는 베네핏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오히려 간단한 요소들에서 큰 차별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기본기를 마스터했다.' '기본기를 다 뗐다.' '기본기 단계에서 벗어났다.' 이런 식의 표현들은 가볍다. 이 기본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번 잡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