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큰 관점으로 보면 입시 미술은 다양한 장르 중 하나일 뿐이다.
입시 미술을 경험하신 분 중,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억이 있다고 얘기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미술을 전공하려면 거의 필수로 거쳐야 하는 관문인 입시 미술이다. 대학에 진학하여 수업을 들어보면, 교수님이 입시 미술을 비판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전공을 하기 위해 입시 미술을 필수로 거쳐야 하는 상황에서 '입시 미술을 했기 때문에'라는 전제의 비판들은, 대안과 해결책이 부족한 탁상공론에 가깝다.
경험을 통한 객관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으로, 입시 미술에 대한 존재 이유와 장점을 풀어본다.
입시 미술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부분을 명확하고 짧은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간 안에 경쟁하며 그려야 하는 그림이다 보니 원리에서 벗어나 자극적으로 변형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대표적인 몇 가지 예시를 살펴보자.
형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투시를 과하게 준다.
눈에 띄게 하려고 색을 높은 채도로, 명암을 고대비로 진행한다.
빠르게 정리하기 위해 외각을 라인으로 처리한다.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위해 일괄적인 암기로 그려낸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눈속임이 될 만한 표현을 패턴화한다.
계속 가벼운 접근들로 연습을 반복하게 되면서, 입시 미술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이 그림에 대한 원리와 해석에서 크게 엇나가게 된다. 익숙한 것들만 그릴 수 있는 상태로 빠지게 될 확률이 높다. 다른 장르, 재료, 소재가 오면 당황하며 표현들이 계속 강하게 나오는 상태를 보고, '입시 미술을 거치며 좋지 않은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정리해 보면 전체적으로 원리에서 벗어난 과다 표현 상태인 경우가 많다.
학생 때 미술을 정확하게 배울만한 기관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입시 미술학원이 최선의 선택지가 된다. 방향이 좋지 않게 잡히는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입시 미술학원의 운영방식이다. 불특정 다수의 대학 진학 목적을 가지고 있는 특성상 상업성을 높게 추구하게 되며, 비용 절감과 학원 고유의 스타일을 통일하기 위해 대부분 학원에서 배출한 대학생을 보조강사로 고용한다. 대학생은 자신의 그림을 정립하고 이해도를 키우기에도 빠듯한 위치다. 그러므로 보조강사에게 배울 수 있는 폭이 작을 수밖에 없다. 입시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이런 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고 그리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앞서 단점을 나열했지만, 입시 미술의 장점이 분명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입시 방식이 고착되고 변질하여 현재의 흐름이 된 것일 뿐, 그 시작점의 취지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구성과 디자인을 하고, 빛과 색을 이해하고, 구조를 파악하고, 조각하듯 점점 작게 그려 나가는 많은 방법과 요소가 기본원리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해석과 처리 방법들이 시간이 흘러 점점 흐려지고 계획의 순서가 뒤로 밀리며, 원리는 일부만 적용되기에 부족한 표현들이 개선되지 않은 채 계승되고 있다.
그런데도 입시 미술을 겪고 나면 확실히 상향되는 부분이 있다. 원리에 벗어나 있는 방향이라도 계속 그리게 되는 환경에 들어가 있으면 대부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이다. 여름, 겨울 특강에 들어가면 하루 8~12시간씩 하루 종일 그리게 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그리기 싫을 때나 힘들 때도 반강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서도 계속 그려낸 경험과 숙련도는 그림 전체를 받쳐줄 만한 기반 중 일부가 되며, 상황에 맞물려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고된 수행 시간을 견뎌내면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부분과 확실히 다르다. 물론 이것들만 취하기에는 자원과 시간의 효율성이 떨어지며 견뎌낸 경험과 숙련도만으로 그림을 잘 그리게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기본 요소 중 몇 가지가 상향되었을 뿐이며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요소마다 집중하여 특화하는 실용적인 방법들이 따로 존재한다. 입시 미술은 전체 영양소를 일정 부분씩 채워주는 멀티비타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작업실에 전공자분들이 오셔서 상담을 해보면 과거에 입시했던 기억이 좋지 않으며, 오히려 입시 미술을 했기에 기본기가 많이 부족하다고 고민하시는 경우가 많다. 수업을 진행해 보면 역시 숙련도가 많이 올라와 있는 상태라 이해도 부분을 채워주고 순서를 맞춰주면, 금방 그림이 상승하는 좋은 결과가 많이 만들어진다.
잘못 해석되어 습관 된 표현들은 덜어내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그 시간마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안정기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그 당시 익혔던 잘못된 방법과 습관들에 대한 분석이 가능해지고, 그만큼의 경험치가 다시 한 번에 흡수되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 단계까지 진행하지 못하고 포기하면 개선하기 힘들고, 개선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미술을 해온 시간이 어떤 방법으로든 적용되어 유익한 경험으로 리뉴얼된다.
입시 미술에서 배웠던 많은 정보를 다시 한번 정리해 충분한 근거를 찾아보고 원리까지 접근해 보면, 입시 미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잘못 배워 방향성이 좋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석으로 바라본 입시 미술은 일반적인 미술과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장르와 소재, 재료가 입시 과목으로 채택되면 입시 미술 카테고리가 생성된다.
나는 입시 미술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이 부분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며 후회하지 않는다. 예전에 그림이 정말 안 좋은 습관으로 채워져 있을 때는 입시 미술을 원망하고, 도움이 안 되는 방해 요소로 생각한 적도 있지만 방법을 몰라 감당하지 못할 때 느낀 감정이다. 하나둘 정리해 나가 보니 어떤 미술이든 어떤 방식으로 배웠던 결국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입시 미술을 배워도 결국 스스로 가공해야 실용성 있게 변환할 수 있다는 점은 조금 씁쓸하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존재했다면 더 성장이 순조로웠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특별한 대안이 없기에, 이런 개념들을 적용해 장. 단점을 분리하고 효율을 만들어 보면 경험했던 입시 미술의 경험치를 전환할 수 있는 날이 온다.
성장하다 보면 입시 미술로 겪는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고, 대처 방법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상적으로 완벽하고 깔끔한 단계식 성장과 환경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 진흙탕에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