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베이어벨트
기억은 숨만 쉬어도 마이너스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억을 잊는 것은 순리이자 자연의 섭리라고 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성장 기준에서는 엄청난 리스크가 되기 때문에 최소화하는 방법들이 필요하다.
망각을 최소화하려면 사라지는 기억을 다시 한번 복기해야 한다. 이 과정이 점점 밀려가는 컨베이어벨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구글링을 해보니 실제로 있는 이론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누군가 먼저 생각한 내용이다.'라는 것을 한 번 더 인식하게 되었다.
컨베이어벨트 이론은 새 정보가 들어왔을 때 그 이전 정보가 과거로 계속 밀려 사라짐에 주목한다. 기억 사이마다 연결성을 갖추면, 무작위로 배열된 상태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이론이다.
이 글 내용에서 전달하고 싶은 큰 의미는 비슷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무언가를 향상하기 위해 배우고, 연구하고, 기억하고, 실행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얻은 정보들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고 취직할 때쯤 수능을 다시 풀어 보려고 하면, 입시 때처럼 풀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다른 관심사와 기억에 밀려 잊힌 상태이고, 다시 공부하면 어느 정도 폼이 돌아오겠지만 갑자기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의 정보가 들어왔을 때 오래 유지할 수 있으면 너무 좋지만,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기에 연계성 없는 오래된 기억부터 지워진다. 연계성은 연상기억법처럼 이미지, 단어 등으로 떠오르게 묶어놓거나 현재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련 기억들이다.
중요한 기억을 오래 유지하려면 연계성 개념을 인지하고 생각하며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
근본적인 구조가 이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진도를 새로 나가려면, 그전에 습득한 내용이 탄탄하게 고정될 정도로 만들어 놔야 한다.
'해 봤다.'라는 체험 형식으로 밀려 나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버텨내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살면서 체험하고 해 본 것들이 매우 많지만 지금 당장 나열해 보기 시작하면, 해본 것들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줄어든다. 분명히 경험하고 체험해 보며 시간을 그렇게 썼는데도 과거의 일이 되니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재밌게 본 책이나 드라마, 영화 등도 디테일까지는 생각 안 나는 상황에서 때로는 지루하고 힘들게 얻어온 어려운 정보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 봤을 때 만약 여기서 한 달 동안 그림에 관련된 일을 아무것도 안 하면, 현재기준 보다 이해도가 떨어지고 관심사에 멀어져 있을 것이다. 물론 기억을 되살리면 다시 복구할 수는 있지만 활동을 멈춘 상태에서 바로 시작하게 됐을 때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그것이 두 달이 되고 석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내가 언제 그렇게 그렸었지?' '내가 어떻게 이렇게 그렸었지?' 언제 그려봤냐는 듯 자신도 헷갈리는 서먹서먹한 상황이 될 것이다.
중요한 맥락을 짚어내기 위해 기억이 흐려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 내용의 포인트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환상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다. 무언가를 배울 때 특정 방법이 좋다거나 갑자기 실력이 향상된다거나 비법처럼 생각하며 정보의 등급을 정해 놓는 방향이 아니다. 현재 갖고 있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 배운 것, 연구해 본 것, 정립한 것들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컨베이어벨트에서 밀리게 된다.
갖고 있는 것을 정리함으로 밀려가는 정보들을 다시 앞으로 당겨올 수가 있고 반복하게 되면 밀려 나가는 시간도 계속 줄여나갈 수 있다. 그 상태가 되었을 때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성장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을 정리해 탄탄하게 고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림을 제대로 구성하는 핵심은 넓고 얕은 물이 아니라 좁아도 깊은 물이 기반이 되며 넓이와 갈래는 그 줄기에서 확장되어야 한다.
갖고 있는 정보들이 계속 하나씩 밀리는 상황에서 계속 하나씩 다시 끌고 오는 작업을 반복하는 일은 꽤 고되다. 시간이 지나면 또 밀려있으니 다시 끌고 와야 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고정작업이 들어가는 등 신경 써야 하는 양이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10년, 20년, 30년을 그려도 같은 양과 디테일의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정리
진도를 빠르게 나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것을 익힌다고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할 수 있는 것과 그리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해석하며 반복으로 고정해 놓아야 컨베이어벨트 구조에서 정보를 유지할 수 있다. 밀린 정보를 다시 수월하게 당겨올 수 있으며 정리를 통해 기억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모두 동등한 구조기 때문에 더 부지런히 당겨서 가져와야 전문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진도는 준비된 상황이 갖춰졌을 때 효율 높게 진행된다.
섭리를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