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방법
슬럼프는 자연스럽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많은 분이 반드시 겪는 일 중 하나가 슬럼프다. 나 역시 슬럼프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꽤 많았다. 슬럼프가 왜 오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다뤄보겠다.
슬럼프라는 단어가 주는 불안함, 불안정함, 불편하고 힘든 느낌들이 있다. 쉽게 말하기 참 어려운 단어다. 다른 사람들이 슬럼프를 어떻게 생각하고 겪으며 이겨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나의 경험담으로 풀어본다.
초. 중.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이 항상 기다려졌으며, 좋아하는 만큼 끄적끄적 그려오다 보니 반에서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어왔었다. 막상 미술을 제대로 시작해 보니 이미 예전부터 예중. 예고. 미술학원 다니면서 배워왔던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화실이나 방과 후 특기 교육에서 짧게 배운 적은 있어도, 장기간 배워온 친구들 사이에 껴있으니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첫 번째 슬럼프였다. 엄밀히 얘기하면 슬럼프라고 생각했던 기간이다.
두 번째 슬럼프는 잘 그리기 위해 많은 방법을 수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 얘기도 듣고 모든 조언을 다 받아들이려 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실행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그림만 그렸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도 그림은 크게 늘지 않았던 것이 슬럼프였다고 생각한 기간이다.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소묘 장르를 어느 정도 성취한 후, 색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거짓말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 번째 슬럼프였다.
시간이 흘러 색을 다룰 줄 알게 되고 장르를 일러스트 쪽으로 바꿨는데,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외부적으로 무시당한 기간이 있었다. 회화하던 사람에 대한 이상한 텃세로, 성공 못 할 것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받았던 것이 네 번째 슬럼프다.
개인적인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그림을 평소처럼 못 그린 기간이 꽤 길었던 상황은 다섯 번째 슬럼프다.
슬럼프는 한번 인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점점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는 계속 노력하고 있는데 그동안 해오고 할 수 있던 것보다 잘 안되거나,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느껴지곤 한다. 그런 일들을 겪어오며 슬럼프는 단어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몰입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식과 방법을 바꿨더니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슬럼프 같은 경우 단순히 경험 부족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림에 투자한 시간이 적으면,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임에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원래 잘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하게 비교하며 재능이 없다고 느꼈고, 인정하기 힘드니 도망칠 곳이 슬럼프밖에 없었다.
두 번째 슬럼프. 그림 정보를 가득 모아놓고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정보를 적용할 수 있는 변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을 그림에 실용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변환이 필요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으며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했다. 앎과 실행은 결이 다르다. 그 방법의 부재를 또 슬럼프로 회피했다.
세 번째 슬럼프. 소묘에서 색을 쓰는 작업으로 넘어가면서, 그림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을 뿐 장르가 다름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림을 만드는 기본 요소는 같지만, 재료와 방법이 다르게 적용이 된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는 만류귀종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던 시기가 이때다. 한 장르를 어느 정도 키웠으면 당연히 다른 것도 잘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했고, 그렇게 접근해서 안 풀리니 슬럼프라 생각했다.
네 번째 슬럼프. 장르도 전환해 봤고 재료도 여러 가지 다뤄본 경험이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 그것에 맞게 쌓아 올라가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었음에도, 정신적으로 조금씩 무너졌다. 왜 이상한 텃세를 받고 도움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잡념이 가득 찼지만, 내가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했으면 충분히 잘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슬럼프. 생전 겪어보지 못한 외부적인 큰일들을 한 달에 한두 번씩 계속 겪으며 그림에 집중 못 하는 상황이 왔었다. 그래도 이런 환경에 휘둘리면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중 못하는 날에도 항상 그림에 관련된 활동을 꼭 하나씩하고 넘어갔다.
여태까지 내가 겪은 슬럼프들은 본래 의미를 충족할 만큼의 고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씩 돌이켜 보면 결국 원래 못하던 애가 안 해봐서 못 했던 것이고, 방법을 몰랐고, 자기가 하면 되는데 주변에 휘둘린 것이다.
슬럼프는 없었다.
그림에 슬럼프는 없다고 생각하며 슬럼프가 있다면, 머리나 손에 신체적으로 큰 부상을 당한다면 생길 수 있다고 판단된다.
영감이 안 떠오른다. 몇 번 안 그려 봤거나 원래 잘 그렸는데 안 그려진다. 생각나던 이론을 잊어먹었다. 그릴 때 잘 안 풀리는 이런 상황들은 모두 성장기에서 오는 과도기다.
무언가 익혀나갈 때 원래 하던 방식들과 다른 방식이 적용되면, 성장 그래프가 잠시 하강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기존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서로 섞이면서 평소보다 조금 불편해지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느낌으로 슬럼프라는 판단을 많이 하게 된다.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몇 장 그리지 않았는데 안 되는 것이 당연하며, 되는 것이 굉장히 이상한 얘기인데 나는 그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짧은 시간에도 효율적인 방법은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연습량은 항상 채워야 한다.
영감이 잘 안 떠오르고 잘 안돼서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히스테리틱한 예술가 모습은 체계가 굉장히 부족한 상태이다. 그동안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복으로 인한 착각일 확률이 굉장히 높고, 기복은 안정기 전에 낮은 단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원하는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정확한 이론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방식이 반드시 녹아 있어야 한다. 이 개념을 확립하기 전까지는 느낌으로 접근하다 보니 잘 안 풀리는 것이 당연하고, 원하는 방향과 느낌도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종합해 봤을 때 슬럼프라고 느끼는 구간은 무언가 시작했을 때. 새로 시작하던 장르나 재료를 바꾸는 초반 부분에서 느낄 확률이 굉장히 높다. 그리고 평소보다 나태해졌을 때. 그림을 그린 기간이 긴 만큼 초심을 잃었던 경우다. 나의 주관이 흐려졌을 때 주변 얘기 하나하나에 굉장히 민감해지며 휘둘리다 슬럼프라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인식을 변형해 슬럼프를 잊어 본다.
정리
슬럼프는 성장기에서 오는 과도기며, 그곳에서 종착지로 끝나면 절대 안 된다. 잘 안 풀릴 때 '발전할 시기가 또 코앞으로 다가왔구나.'라고 마인드 세팅을 해주는 것이 좋다.
막힌 부분만 해결되면 또 한 단계 수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징조가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 슬럼프가 있긴 있다. 평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들 만한 사고나 사건이 있을 때 찾아온다.
이 시안을 작성한 것은 21년도이고 현재 글을 다듬는 것은 23년도이다. 23년도에 사고를 당하게 되며 얼굴과 손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 아스팔트에 치아 여러 개가 갈리고 양손 뼈가 보일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평생 겪고 싶지 않았던 육체적 손상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하필이면 많은 인원으로 대규모 작업을 하던 시기라 쉴 수 없었다. 사고 다음 날 입안에 피가 가득하고 손가락만 움직여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피를 닦으며 손은 부목처럼 붕대로 고정해 하루 종일 그릴 수밖에 없었다. 치료를 병행하며, 평소 감각보다 훨씬 둔했지만, 이해도를 우선순위에 두고 표현을 뒷순위로 두었던 연습 방법 덕분에, 회복하기 전 장기 작업을 무사히 완료할 수 있었다. 현재도 후유증으로 손에 근육이 튀거나 수전증 증상이 간헐적으로 있지만, 사고 전보다 기량이 떨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학생들 앞에서 시범할 때 증상이 생기면 조금 난감하긴 한데, 이해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기에 표현을 담당하는 손은 상황에 적응해 가면 된다.
손상에 의해 슬럼프가 올 정도라면, 손을 아예 못 쓰는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동안 슬럼프에 대한 시행착오와 정의가 없었다면 사고가 있었을 때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을 수도 있다.
평범한 상황에서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갖게 된 마인드셋이기 때문에 공감이 조금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도 분명 더 생산적인 세팅이다. 도움 되는 부분은 가져와서 장착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슬럼프는 개인의 경험과 성향마다 다르게 다가오니 좋은 세팅을 만들어 극복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