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의 중요성
지우개는 대체 불가의 필수 재료다.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다.' 이 문장에 영향받아 꽤 오랜 시간 동안 잘못된 방향을 잡았고, 개선점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다.'라는 얘기를 처음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지우개를 그냥 지우거나 수정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우개가 하얀 연필이라고 하니 생각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이 당시에, 대학생 보조 강사였는데 굉장히 의미심장한 느낌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다.'라는 말은 입시 미술계에서 꽤 유명한 말이다. 확실한 정보가 부족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나고 보니, 정확한 의미는 '지우개로 할 수 있는 고유의 표현들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출처 없이 내려오는 단편적인 정보를 전달할 때는 전달자의 풀이와 해석이 굉장히 중요한데, 내가 듣게 된 해석은 '연필처럼 표현할 수 있다'라는 표면적인 풀이였다.
'지우개가 하얀 연필이구나, 그럼 연필처럼 써야겠네.'
분야에 이해도가 낮을 때는 의아할 만한 실수가 자주 일어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판단 기준이 없었기에 지우개를 연필처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연필 사용법에 대한 확실한 체계도 부족했기에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지우개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연필처럼 쓴답시고 모서리를 이용해 흰색 선을 만들어 긋는 방식을 택하고, 그 선을 모아 밝은 면을 해칭으로 만드니, 원리에 맞는 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부분들에 해결법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안 좋은 쪽으로 점점 발전되었다. '지우개도 하얀 연필이라고 하니, 모든 재료를 연필처럼 써봐야겠다.' 수채화를 해보면서 잘 안될때, 붓을 연필처럼 사용하는 방식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을거라 근거 없는 믿음을 가졌다.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한다는 믿음은, 체계적인 기반이 존재하는 후반부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분야에 대한 통찰력이 없으니 답답한 상황에 놓이고, 주변에 정확하게 해석해 주는 경우가 없었기에, 이 행동들을 몇 년 동안 반복하게 되었다. 재료를 계속 바꿔가면서 연필에 이입하며 사용하는 방식이었고, 지우개가 하얀 연필이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된 행동이었다. 물론 중간에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유명한 말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맥락을 못 잡고 진행되니, 크게 성장하기 힘들었다.
여러 장르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그림 이해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인지했다. 인지를 시작으로 보완하며 재정립해 나갈 수 있었다. 재료마다 만들어진 원리와 쓰임새를 파악해 활용도를 높이는 활성화로, 고유의 특성들을 찾아 사용하는 방식이다.
정리
비유법임을 감안해도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우개로 표현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있어도 적절하지 못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지우개만으로 표현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라는 말로 대체되었다면, 그 고유의 표현 영역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방향이 비교적 손쉽게 잡혔을 것이다.
정보는 방향이 명확히 잡혀있어야 한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을수록 실용성과 멀어지게 되며, 특히 기술이 포함된 장르에서는 치명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재료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가며 정립하는 방법은 괜찮지만, 기준점 없이 비슷하게 실행 해 보는 방향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사용 목적이 확실한 특정 재료를 다른 재료의 방식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서로가 대체된다면 재료를 처음부터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개념을 더 빨리 접했다면 지우개뿐만 아니라, 재료를 변경할 때마다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정보로 일어나는 유사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충분히 해석하는 단계를 거쳐 적용해 나가는 연습을 진행하자.
예민함과 세분화는 뒷받침되는 근거 유무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