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칼의 이론

지름길

by 김앤트

칼날은 항상 날카로워야 한다.


무뎌진 칼의 이론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풀이 개념이다.

나는 기억력이 꽤 안 좋은 편이다. 책을 보면서도 전페이지 내용이 생각이 안 나서 다시 볼 정도로 잘 잊어먹는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가 뒤돌아서면 생각이 안 나는 특성이, 그림에 적용됐을 때 상황이 꽤 힘들어진다.

반대로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경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정보들은 실시간으로 손실되고 있다. '사라지는 기억 컨베이어벨트' 편에서 다룬 내용과 같이,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 가면 이런 현상이 더 많이 일어난다.

성장을 하기 위해 쌓이는 정보를 해석하고 정리하여 실행에 옮기며, 확인과 검증을 통해 데이터를 구축하기도 바쁜 와중에 모아놨던 데이터가 계속 사라진다. 누수가 생긴 듯 지금 이 순간에도 야금야금 빠져나가고 있다.

근래에 수업을 점점 줄이면서 다른 일 하는 시간을 많이 늘리고 수업을 적게 들어가니, 십 년 이상 해온 장르인데도 어색하고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진행하다 보면 금방 복구가 되긴 하지만 버벅거리거나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수업 준비를 할 때 그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빠져나가는 데이터를 막기 위해서 생긴 습관으로, 수업 시간에도 한글파일이나 핸드폰 메모장에 무언가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내용을 적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상단 카테고리부터 정리하여 보완하는 방식이다. 몇 년 동안 작성한 한 두 줄을 모아보니 1000장이 넘는 분량이었고, 대부분 이 책 내용에 초석이 되었다.


발을 담그고 있지 않으면 계속 무뎌진다.


아무리 칼을 예리하게 갈아놔도 쓰다 보면 무뎌지고 관리를 안 하면 녹슨다. 더 날카로워도 모자란 상황에서 무뎌지는 마이너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마이너스 개념에 접근하기 힘들고, 조금 알게 되어도 진도를 나가느라 못 막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보면 1, 2, 3, 4를 익히고 5에 대한 진도를 나갔을 때 1이 잊힌다. 6, 7을 추가로 더 익히면서 2, 3이 잊힌다. 진도를 계속 나가도 내용만 바뀔 뿐 사용할 수 있는 숫자는 4개가 된다.

5를 익힐 때 1이 잊히면 다시 1을 복구시켜야 하고, 6을 익혔을 때 2가 사라지면 다시 2를 복구시키는 작업이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성장은 마이너스를 막지 않으면 플러스 되기 힘든 구조다. 이 과정을 거치면 여러 가지 경험이 체험해 본 추억으로 끝나지 않고, 실사용이 가능한 능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복습을 필수로 해나가야 한다.


김앤트, 초과, 23.2x28.2cm, Charcoal 12 min, 2020


세팅을 갖추지 않고 얻은 정보는 활성화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도 드라마틱한 성장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좋은 방향은 있지만 특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 된다. 특별한 정보를 얻어도 해석하여 소화할 수 없다면, 겉핥기가 되며 핵심에 접근하기 어렵다. 반대로 세팅이 되었을 때는 작은 정보도 보완하여 특별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장르 확장하는 과정에서 바꿀 때마다 적용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중요한 내용들도 중간중간 잊어먹게 되는 상황을 겪었다. 한 장르에서 날카롭게 갈아놨던 날이 녹슬다 못해 부식됐던 경험들이었다.

시즌과 비시즌을 나눠 컨디션이 다른 장르도 많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항상 시즌에 임하는 상태로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 좋다. 날을 계속 예리하게 갈아놓으면서 녹슬지 않고 무뎌지지 않게 준비를 해놓으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표현으로 연결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시간과 비용을 쓰며 힘들게 얻은 정보들을 잃지 말고, 계속 유지하며 키워나갈 수 있도록 계속 적으며 복습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도록 하자.


예리함을 유지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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