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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기 Feb 28. 2020

세상이 만들어낸 그의 웃음... 조커

조커

히어로에 대한 관심과 환호는 언제나 높지만 빌런에 대한 이해는 늘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빌런이 존재하지 않으면 히어로도 그 가치가 떨어지는 법, 2016년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가 남다른 조명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그 만큼 관심과 기대가 높았고 작품의 질 또한 괜찮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스토리를 풀어가는 데 있어 각각의 캐릭터를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개성을 살리기보다 구성에 치중했고 특정 인물에게 과도한 관심이 쏠려 균형을 이루진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번엔 DC 역사상 최고의 빌런에 속하는 또 한 명의 인물에 관심을 가져볼까 한다. 다행히도 앞에서 언급한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다. 충분한 개성 표현과 제대로 된 균형 맞추기, 거기에 더 나아가 내면의 고통을 훑어 내리는 매력까지. 이 정도면 그 동안 소외된 아픔을 충분히 감싸주지 않았나 싶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2019)이다.



웃고 있는데 삶은 고달프다. 본인이 원했던 웃음이 아니라는 게 더욱 슬프다. 그런데 이 슬픈 상황에 정작 본인은 웃음을 터뜨려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꿈꾸는 삶은 코미디언이다. 내가 웃고 즐겁기 보다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직업이다. 본인의 아픔과 슬픔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바로 광대의 삶이다. 조커는 이렇게 탄생한다. 아픔과 슬픔을 본인의 방식으로 해석해 나만의 해학으로 풀어낼 줄 안다. 그 방법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는 조커가 됐다. 하루 일을 마치고 매번 올라야만 하는 계단은 부(富)와 빈(貧)을 가르는 원초적인 시선을 대변한다. 계단을 통해 계층의 구분을 묘사하는 건 영화 <기생충>(2019)과 닮았다. 하지만 단순히 높고 낮음의 높이로 그 벽의 두꺼운 부분을 표현하고자 한 건 아니다. 계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급격한 경사를 최대한 나타냈지만 계단은 분명 오르내림의 단계를 밟을 줄 안다. 그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계층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거다. 심지어 계단을 오른 후 걸어가는 거리도 경사로다. 비스듬한 거리를 그는 기우뚱 걸어간다. 다시 말해 변혁을 해내고픈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 영화는 결국 그 내재된 욕구를 어떻게 폭발시켜 분출해내느냐에 목적을 둔다.



상상을 하는 건 현실로부터의 도피다. 하지만 머레이 쇼를 보며 하는 상상은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현실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간 중간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과 미소가 더욱 두렵게 느껴진다. 사장으로부터 외부의 불만사항을 전달받을 때 올라가는 그의 입 꼬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두려운 공포가 절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힘겨운 계단을 어렵사리 올라 문자 그대로 거지같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 손가락 권총을 자신에게 쏴대는 그의 비뚠 표정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 마치 스스로를 거부하는 몸짓인양 소통을 놔버리고 조금씩 어둠의 공포로 빠져 들어간다. 이 작품은 이처럼 밀당을 제법 할 줄 안다. 속도의 완급조절을 통해 조커의 탄생기를 정말 제대로 그려냈다. 아서(호아킨 피닉스 분)는 때때로 다른 사람이 된다. 겁먹고 용기를 잃은 한낱 광대에 불과하다가도 어느새 새로운 모습의 아서를 꿈꾼다. 동료가 건네준 총을 들고 춤을 추다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는 조커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순간을 넘긴 채 그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차츰 변해가는 모습을 그려낸 건 연출과 연기의 절묘한 조합이다.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뛰어간 어느 화장실에서 그는 의미를 알 듯 모를 듯한 춤을 이어간다. 격렬하지도 않고 차분하지도 않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이다. 마치 자신이 그 동안 억누르고 있던 정신지체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뿜어내듯이 말이다. 정신지체의 가장 큰 어려움이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 해야 하는 거라고 적었던 그의 메모가 기억나는 장면이다. 그는 우발적인 범행으로 인해 일종의 각성을 한다. 참지 못해 웃음으로 표현하곤 했었던 그의 고통이 드디어 그 정체를 드러낸 장면이 됐다. 억지웃음도 억지 고통도 아닌 자연스러운 표현이 그의 우발적인 범행과 춤으로 승화됐다. 그는 그렇게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점차 하이드씨가 지킬박사의 내면을 잠식해나가듯이 조커 또한 아서 플렉의 내면을 조금씩 잠식해버린다. 엄마 페니 플렉(프란시스 콘로이 분)의 편지로 놀라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그가 웨인 가를 방문해 브루스와 조우하게 된 건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의미가 크다. 단순한 재미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라기보다 앞으로 전개될 DC확장유니버스와의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는 점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페니 플렉의 편지가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페니를 살해하고, 그와 함께 자신을 찾아온 동료도 살해하고, 그는 진정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커’가 되어간다. 제대로 된 분장을 하고 드디어 계단을 내려오게 된 그는 춤을 춘다. 그 동안 그렇게 오르고 또 올랐던 계단을 스스로 내려오면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거다. 더 이상 오르기 위해 힘겨운 삶을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겉으로 있는 힘껏 표현하고 있음이다. 두 형사에게 쫓겨 지하철에서 어쩔 수 없이 광대 가면을 훔쳐 쓰지만 이것마저 이내 벗어던짐은 조커로서의 정체성의 승화로 해석해도 좋다. 머레이 쇼에 출현해 자신을 ‘조커’로 소개해달라는 모습은 진정으로 세상에 조커의 탄생을 알리는 대망의 이벤트가 됐다. 내 삶은 코미디 그 자체라고 얘기하는 그의 웃음을 띤 말 한 마디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강한 한 방의 펀치가 됐다. 세상이 그를 조커로 만들었고 우리 모두가 그를 조커로 만들었다. 그는 애써 드러내진 않지만 삶을 냉철하게 해석하고 이를 제대로 풍자했다. 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2008)에서의 히스 레저가 최적의 조커 연기를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역사는 뒤집어지는 것이고 전설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관객들은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을 그저 즐기면 된다.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새로운 시각에서 ‘조커’라는 캐릭터의 내면을 이해하고 구성했다. 빌런으로서의 조커보다 내면에서 비춰 본 조커의 탄생기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쉬운 점도 물론 있다. 토마스 웨인의 죽음을 너무 쫓기듯 할애했다. 세계관을 만들고 익숙한 유니버스에 이야기를 포함시키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억지로 우겨넣어 관객들에게 이해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무수히 조명을 받았던 히어로가 아닌 빌런의 세계관을 열었고, 그들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뒤집어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얘기하면서 말이다. 원초적인 질문에서 이해하자면 우리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서 그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음에 그 안타까움이 더욱 밀려온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가슴 한 편을 미어터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더욱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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