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은 어려서부터 똑똑했다. 또래보다 말을 빨리 시작했고 한글은 가르치지 않았는데 혼자서 다 떼 버렸다. 소현의 능력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옛말처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수학이 본격적으로 성적을 좌우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전교 1등은 소현의 차지였다.
타고난 머리만 믿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성실함이 소현의 최고의 장점이라고 부모님이 인정할 만큼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는 법 없는 모범생이었다. 재능과 노력으로 무장한 소현에게 적수는 없었다. 소현이란 이름보다 ‘전교 1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수학은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그런 소현이 수재들의 집합소인 상산고에 원서를 넣은 건 당연했다. 상산고는 대치동에서 세 살 때부터 사교육에 둘러싸여 준비한 아이들도 족족 떨어진다는 자타공인 최고의 명문이었다. 강남 한복판이 아닌 경기도 외곽 출신에 고액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었던 소현은 높은 성적으로 당당하게 상산고에 합격했다. 상산고는 일명 의대 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로 졸업생 대부분이 의대로 진학한다. 부모님은 소현이 의사라도 된 것처럼 기뻐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소현은 그대로 졸업해서 의사가 될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인생이 항상 그렇게 장밋빛일 리는 없었다. 소현은 상산고 1학년 첫 학기부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첫 시험부터 전교 꼴찌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충격이었다. 몇 번이나 성적표를 다시 봤지만 세 자리 수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더는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이를 악물었다. 기숙사 자습실 문을 제일 먼저 열고 들어가고 제일 늦게 닫고 나왔다. 잠은 건강에 심하게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만 잤다. 그런데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자신 있었던 수학 점수가 달랑 50점이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면서 공부했지만 바로 어제까지 옆에서 게임하다가 시험 본 친구는 100점, 자기는 50점이었다. 이쯤 되자 소현은 자기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학교생활이 계속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머리 좋다, 똑똑하다, 수재다, 천재다 소리만 듣고 자라서 본인이 정말 그런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소현은 자기가 머리가 좋은 게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머리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인정하자 상산고 생활은 지옥으로 변했다. 중학교 때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언니가 특목고에 진학했다가 낮은 성적에 충격받고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도 혹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극도의 스트레스와 떨어진 자존감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곧 의대에 진학할 딸의 모습을 그리며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잠 못 드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항상 1등이었다가 전교 꼴찌가 된 심정이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그렇다는 사실이 더욱 소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존감은 끝없이 추락했고 시험 때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매번 쾌감과 희열을 선사해서 마음 깊이 애정했던 공부에게 완전히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 한 번도 놓아본 적 없었던 공부가 하기 싫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험을 앞두고는 밥이 아예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빈속인데 시험만 보면 토하고 양호실로 가기 일쑤였다. 시험 시간에는 손이 덜덜 떨리고 앞이 하얘져서 시험지의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청심환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우울증, 자퇴, 검정고시 이런 단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결국 소현은 고등학교 3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한 채. 전교생의 거의 대다수가 SKY와 의대, 치대, 한의대에 진학하는 분위기 속에서 소현은 다른 학교를 선택할 자유조차 없었다. 안 될 걸 알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성균관대 의대를 목표로 준비했다. 하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의사는 멀어진 꿈이란 것을.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 수능을 망친 소현은 그럼에도 절망했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 말고는 한 게 없었다. 특히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공부만 죽어라 했다. 노력하면 답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의대 사관학교 상산고를 3년 다닌 끝은 어떤 의대에도 원서조차 내지 못할 초라한 수능 성적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의사가 소현의 꿈은 아니었다. 그냥 공부 잘하는 우등생 대부분이 그렇듯이 투철한 사명감이나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공부 잘하니까 당연히 의대 가야 해서 의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의사가 적성에 맞을지, 의대에 진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희생들을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수능을 망치고 더 절망스러웠다.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 없이 의사만 목표로 했는데 의대를 못 가게 되니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전교생이 다 가는 의대에 못 간 소현은 낙오자, 루저였다. 대입이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만신창이가 된 패잔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소현에게 아빠가 한 가지 카드를 내밀었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 해양대학교였다. 의아해하는 소현에게 아빠는 그곳에 진학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 근거들을 들어 설명했다. 첫째, 소현의 멘털이 재수의 중압감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둘째, 기약 없는 재수 생활을 뒷받침하기엔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 셋째, 한국 해양대학교는 본인만 잘하면 졸업 후 취업이 비교적 보장돼 있었다. 넷째, 이과적인 소현의 성향과 잘 맞았다.
학원을 운영하는 아빠가 입시 정보를 알아보다가 딸에게 딱 맞는다고 판단하고 제안한 학교였다. 소현은 기대가 컸던 아빠를 실망시켜 죄송한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그리로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학인지, 무슨 공부를 배우는 곳인지, 나와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되는 건지 전혀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