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학 합격증을 받아 들고 나니 소현은 인생의 한 관문을 넘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무너진 자존감과 청심환은 안녕. 대학에선 고등학교 3년 동안 힘들었던 시간을 마음껏 보상받으리라!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드디어 기다리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공지가 왔다. “우리 학교에 온 걸 환영한다, 후배야!” “캠퍼스의 낭만을 제대로 불살라 보자!” 이런 달달하고 따뜻한 새내기 환영식을 상상하니 룰루랄라 미소가 절로 나왔다. 소현이 입학한 한국 해양대학교는 부산에 있다. 가방을 꾸리는 손길조차 즐거웠다. 외국 여행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수험 생활 동안 못 입어본 하늘거리는 원피스, 처음으로 사 본 각종 화장품들, 예쁜 머리끈과 귀걸이, 목걸이 등을 챙겨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웬걸, 학교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 풍선과 꽃다발, 색종이 조각과 활짝 웃는 선배들이 가득할 걸로 예상했던 소현은 어리둥절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넓기만 한 승선 생활관 공터 한가운데에 똑같은 제복을 맞춰 입은 선배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렬로 각 잡고 서 있었다. 해양대가 제복을 입는다는 것도 모르고 간 소현이 뭐지, 하는 사이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다들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 산 스커트를 입고 립스틱에 마스카라까지 칠하고 간 소현은 그 물결에 떠밀려 정신없이 일단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공터 전체에 싸늘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또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읭???? 소현이 자기 귀를 의심하는 사이 군기가 바짝 든 동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마치 소현만 빼고 다 같이 미리 연습을 하고 온 것처럼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소현은 그 광경이 게임에 나오는 가상현실처럼 느껴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건 꿈일 거야. 의도치 않게 혼자 서 있게 된 소현은 즉시 선배들의 표적이 됐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무서워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대가리를 어떻게 박는지도 몰라서 일단 옆의 친구를 보고 최대한 흉내를 냈다. 몸의 균형이 잡히질 않았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볼 수도 없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호통 소리와 괴로운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마스카라가 이마까지 번져 내렸다.
신입생 서프라이즈를 위한 몰래카메라일 거란 소현의 한 가닥 기대를 저버리고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똑같은 일과가 이어졌다. 소현은 씻지도 못하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신 채 새벽부터 일어나 얼차려를 받고 구보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해사대(참조: 한국 해양대학교의 여러 단과대학 중 제복을 입고 상선을 타기 위한 교육을 받는 유일한 대학) 입학생이라면 누구나 받는 ‘적응교육’이었다. ‘적응교육’은 혹독했다. 군대에 가 보진 않았지만 군대 신병 훈련소에 입소한 군인들의 심정이 이것보다 더할까 싶었다. 실제로 적응교육 받다가 자퇴하는 학생이 적지 않을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다. 간신히 입시 지옥에서 벗어났다 싶었더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