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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Jun 17. 2021

수능 망쳤다고 인생이 끝난 건 아니었다



해사대학은 기본적으로 제복을 입는 학교다. 따라서 군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식훈련이나 체력훈련은 당연하게 이루어졌다. 대학교인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위계질서도 심했다. 동기들은 대학 신입생인지 군대 신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생활에 질려 하나둘씩 떠났다. 그런데도 소현은 웬일인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양대는 제복을 입는 학교라는 것, 군대와 닮은 면이 많은 곳이라는 것 모두 알고 들어온 친구들도 그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소현은 오히려 몸이 힘든 것 말고는 힘든 게 없어서 좋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지옥 속에서 보낸 것이 도움이 됐다.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질릴 정도로 겪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쯤이야 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몸이 괴로울수록 정신은 맑아졌다. 상산고에선 몸은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 편했을지 몰라도 머릿속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힘들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걸 직접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훈련도 계속 받다 보니 참을만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쾌청했다. 대입을 준비하면서 스트레스와 함께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살들도 규칙적인 생활과 혹독한 체력 단련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마음과 몸이 한꺼번에 해독을 한 듯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받은 극한 훈련은 소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지난 3년 간의 좌절과 고통 하나까지 남김없이 날려 주었다. 소현은 안팎으로 천천히 자신감을 회복해갔다.      



해양대는 전원 기숙사 생활이고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섬 자체가 학교인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시내와 멀찌감치 떨어진 외진 곳이라 갈 만한 장소라고는 술집 몇 군데가 전부였다. 본의 아니게 일과가 지극히 단순해졌다. 주중엔 수업받고 훈련받은 다음 복장 점검, 위생 점검, 인원 점검 등 각종 점검에 치여 살았다. 주말엔 평일의 피로를 풀기 위해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자거나 유일하게 갈 곳인 술집을 드나들며 술만 마셨다. 공부, 훈련, 잠, 술, 이 네 가지밖에 할 게 없었다.     



뭘 배우는지도 모르고 들어왔지만 공부는 늘 습관처럼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한 만큼 학점은 잘 나왔다.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전공 수업들이 신기할 정도로 적성에 잘 맞았다. 하지만 배 한 번 타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받는 전공 수업 수박 겉핥기 같았다. 수박의 빨간 속살을 먹고 싶은데 딱딱하고 아무 맛도 없는 초록색 껍질만 냅다 핥아먹는 기분이었다.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소현은 군인이 이유를 모르고 삽질하듯 그냥 기계처럼 대학생활의 첫 2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3학년이 된 소현에게 운명의 그날이 왔다. 바로 승선실습을 나간 것이었다. 실습은 소현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다. 3학년이 되면 실제로 승선하여 6개월 간 현장에서 직접 일을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된다. 소현은 운 좋게 대기업인 SK해운에서 승선실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실습기간 동안 소현은 인생이 송두리째 재편집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2년 동안 책으로만 배운 이론들을 실제로 써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지 알게 된 것이다. 소현은 거대한 선박을 움직이는 엔진이 자신의 손끝으로부터 움직이는 걸 직접 체험하면서 그동안의 시간들이 의미 없는 삽질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다. 소현은 입학 2년 만에 처음으로 이 길을 쭉 걸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지난 시간들이 후회됐다. 기계처럼 하루를 ‘살아내느라’ 다른 경험을 해본 게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육지를 떠나 바다 위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것인 만큼 새로운 기분과는 별개로 이 역시 힘들었다. 같이 승선한 사람들은 육지에서 유럽여행을 했던 경험,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즐겁게 쌓았던 추억 등을 양분 삼아 그 과정을 견디고 있었다. 소현은 그런 추억을 꺼내려야 꺼낼 것이 없었다. 그저 힘들었다, 피곤하다, 이런 기억들뿐이었다. 1, 2 학년 때 너무 아무것도 안 한 것이 후회막심이었다. 다시 학교를 간다면 내 앞에 주어진 모든 경험의 기회를 잡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6개월간의 회사 승선실습을 마친 소현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공부와 훈련으로 점철된 생활에서 탈피해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2학기 학교 배 승선실습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사관부에 자원했다. 사관부는 다른 대학교의 학생회 개념인데 모두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훈련받는 만큼 당연히 일반 대학 학생회보다 학생들과 훨씬 더 밀접한 소통이 가능했다. 소현은 학교 배 사관부에서 보급 사관 직책을 맡아 실습선 내 학생들의 관급품과 실습선 내 매점 관리를 맡았다. 힘겨운 승선 생활을 견디기 위한 체력을 키우려고 크로스핏과 테니스를 꾸준히 했고, 해양 박물관에서 근로 장학생을 하는 등 필요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이런 과외 활동들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소현의 공부에도 날개를 달아주었다. 원래부터 적성에 잘 맞았던 선박 공부는 이제 꼭 마스터하고 싶은 분야가 됐다. 소현은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불을 밝힌 채 공부에 매진했다. 파고들수록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 억지로 울면서 하던 공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의대로 진학한 친구들이 공부에 깔려서 죽을 것 같다고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의대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현재 생활에 더더욱 만족할 수 있었다.    


 

멀리 돌아왔고 그 과정이 지난했지만 소현은 결국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무난하게 의대에 진학했다면 몰랐을 세상, 무한한 바다가 소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바로 앞에 선 소현은 가슴이 벅찼다.



이렇게 괜찮은 삶도 있구나. 수능 망쳤다고 인생이 끝은 아니구나. 의대나 SKY를 나오지 않아도 세상에는 꿈을 펼쳐 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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