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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Jun 20. 2021

반디앤루니스는 나의 '국화꽃 향기'였다

영화 <국화꽃 향기> 中



며칠 전 슬픈 소식을 들었다. 대형 서점 반디앤루니스가 부도 처리됐다고 한다. 단군 이래 가장 책을 읽지 않고 그나마도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에서 책을 구입하는 21세기에 오프라인 서점 경영난이 심각할 거라는 건 예상한 바였지만 이렇게 대형 서점이 넘어지는 건 책을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선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그곳은 내게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반딧불이와 달빛처럼 나의 청춘을 찬란하게 비춰주던 존재였다. 반디앤루니스라는 예쁜 이름의 서점이 강남 한복판에 초대형으로 오픈했다는 소식에 들떠서 매일 일부러 들렀었다. 그 시절 반디앤루니스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약속을 기다리면서 책 한 권 훑어보기 좋아서인지 대부분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2호선 삼성역에 내리면서부터 내 마음은 설렜었다. 코엑스몰 입구의 음식점, 아이스크림 가게 등을 지나 저 멀리 반디앤루니스의 열린 문이 보이면 꼭 내게 어서 오라고 양팔을 한껏 벌리고 있는 착각이 들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서점에서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할리우드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를 내걸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휘황찬란한 메가박스가 있었지만 나는 기꺼이 반디앤루니스를 내 종착지로 삼았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책, 무엇보다 서점이 주는 고유한 매력을 극장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반디앤루니스에서 소중한 추억을 많이 쌓았다. 초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정문 앞 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고, 미군 제복을 멋지게 갖춰 입은 여군에게서 저자 사인을 받으려고 책을 사 들고 한 시간 넘게 줄을 섰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가장 먼저 이곳으로 달려가 수많은 책들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위로했고, 친구와의 약속이 갑자기 깨져도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문구류 덕후인 나는 한켠에 자리한 문구류 코너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점을 나올 때마다 내 손엔 필기도구, 노트, 메모장 등이 꼭 하나씩은 들려 있었다.



아... 서가 한쪽 구석 바닥에 등을 붙이고 앉아 양 옆에 소설책을 탑처럼 쌓아놓은 채 밥을 굶어가면서 읽던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때 읽었던 소설 중 '국화꽃 향기'가 기억난다. 밀리언 셀러로 영화로까지 제작됐을 정도로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한 작품이었다.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차가운 서점 바닥에서 남몰래 훌쩍였던 바로 그 책. 영화 속 미주 역을 맡은 배우 장진영 씨는 소설처럼 정말로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반디앤루니스 부도 소식에 왜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반디앤루니스에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 왜 유독 '국화꽃 향기'가 소환됐을까.



"문득 그녀의 머릿결에서 국화 내음 같은 좋은 향이 났다. 청명한 날씨의 푸른 들판에 핀 들국화 같은, 분명히 그 내음이었다. 놀라웠다. 수많은 사람들의 잡탕의 냄새로 향기란 게 살아 있을 리 만무한 지하철 안에서 미량의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머리카락 뒤에 선 승우는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떨림을 느꼈다. 승우는 그녀의 머릿결 가까이에 코를 대고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틀림없는 국화 내음이었다. 야생의 싱그러움과 햇빛 분말이 노랗게 날아다니는 듯, 은은하면서도 담백한."   - 김하인 <국화꽃 향기> 中 -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이 구절을 읽어보니 이제야 알겠다. '야생의 싱그러움과 햇빛 분말이 노랗게 날아다니는 듯, 은은하면서도 담백한' 국화꽃 향기 같은 장소가 내겐 그 서점이었다. 뭐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어찌 보면 그냥 책을 쌓아놓은 평범한 서점일 뿐인데 나는 늘 그곳에서 승우가 미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경이로운 떨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서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고, 내 사랑이 떠나간다는 소식에 지금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을 정리할지, 아니면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넘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아직 약간의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걸까. 이러다가 대형 서점의 상징인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사라지면 어떡하나 라는 위기감이 든다. 부디, 나 혼자만의 기우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닌 추억을 쌓는 공간이다. 우리는 서점을 통해 그 시절 서점 앞에서 기다리던 누군가를 함께 떠올린다.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건 추억이 사라진다는 뜻이고, 그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이번 주말 소중한 서점 나들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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