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재촉에 소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부터 열 번도 넘게 쳐다본 시계를 다시 보았다. 아주 잠깐 딴생각을 한 것 같은데 어느새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탁자 위 짜장면은 이미 불어 터져 떡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었다. 아빠는 조금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젓가락으로 열심히 그 정체모를 음식을 헤쳤다. 하지만 소현은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국수 한 가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도 제일 맛있다고 소문난 중국집이었지만 유명세가 소현의 긴장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2018년 1월 17일은 소현에게 기념비 같은 날이었다. 바로 대망의 첫 항해 실습날이기 때문이다. 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해양대 3학년은 대부분 실습을 한다. 소현의 학과는 한 학기는 회사 실습, 한 학기는 학교 배 실습을 한다. 간혹 회사 실습을 못 간 학생은 두 학기 모두 학교 배 실습을 하기도 한다. 이날은 회사 실습 첫날이자 해양대 입학 후 처음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날이었다. 대부분 회사 선박은 실기사 1명만 태우기 때문에 소현 혼자 타는 것이라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또 앞으로 6개월 간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식욕이 싹 사라졌다.
안쓰러워하는 아빠의 얼굴과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그만 눈물이 툭 떨어질 뻔했다. 결국 소현은 짜장면을 한 젓가락도 입에 넣지 못한 채 허겁지겁 인천항 집결 장소로 달려갔다. 간단한 확인을 마친 소현은 드디어 첫 항해를 책임질 거대한 선박에 승선했다. 배에 오르면서 선배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을 입 속으로 되뇌었다.
선박 위 기관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소현은 그 넓은 배가 떠나가라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기관사들이 깜짝 놀란 듯 흘긋 돌아보더니 면박을 주었다.
칭찬은 몰라도 나쁜 인상은 주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소현은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돌아가면서 쳐다보는 기관사들의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소현은 배에 오르자마자 바늘방석이었다. 6개월 동안 장난 아니겠구나 라는 절망감이 훅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는 혼이 쏙 빠진 채로 보냈다. 배 구조부터 대략난감이었다. 책으로 미리 익히고 갔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론과 실제는 달랐다. 무엇보다 독특한 엘리베이터 사용법을 숙지하지 못해 진땀을 뺐다. 배의 엘리베이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엘리베이터와 달리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일반 엘리베이터는 자동문이 열리면 그냥 타고 내리면 되는데 여기는 자동문이 열린 다음 방문처럼 손잡이를 돌려서 열어야 하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엔 너무 당황해서 엘리베이터에 갇힌 줄 알고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니 방을 배정받고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한 건 당연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기관실, 방, 식당만 왔다 갔다 했다. 종갓집에 갓 시집 온 며느리처럼 층층시하 눈치 보고 일 배우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주에 입항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허둥대는 사이 벌써 2주가 흘러간 것이었다. 소현은 선원들과 다 같이 갑판으로 올라갔다. 승선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바다였다. 저 멀리 한눈에도 이국적인 호주 글래드스톤항이 눈에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바다새들이 육지 근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소현은 그제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겨우 2주 만에 보는 육지인데 코끝이 시릴 만큼 반가웠다. 소현의 그런 기분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기관장님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사실 첫날 면박을 준 건 사관들끼리 실습생 놀리려고 장난친 거였다고. 너 아주 잘하고 있다고.
처음 보는 태평양, 처음 방문하는 호주, 처음 만난 바다새떼,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출발이 제법 괜찮다는 확신이 생겼다. 문득 2주 전 젓가락도 못 댄 짜장면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지금 이 기분이면 곱빼기로도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