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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순원 <소나기>

by 새벽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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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 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 황순원 <소나기> -




사랑이라는 감정을 잊은 지 꽤 오래다. 엄마가 되면서부터였나 보다. 엄마와 사랑은 뭐랄까,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는 별개의 존재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엄마도 예전엔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랑 이야기를 구상하면서부터 내 사랑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젠 노력을 해야 그나마 사랑의 실체가 어렴풋이 잡힐 기미라도 보인다는 게 쓸쓸하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읽고 지나간 멜로 영화도 괜히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는 줄거리를 파악한 것 외에 가슴을 건드리는 감정은 건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번 주말 비 예보가 있다는 뉴스를 보다가 문득 황순원의 <소나기>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동시에 같이 소환된 기억 속 안경 쓴 그 남학생의 옆모습. 아, 기억났다. 사랑은 순수한 것이었다. 이번 주말은 비와 함께 학창 시절 '소나기'처럼 풋풋했던 내 사랑을 떠올려 봐야겠다. 너, 잘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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