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로도 제작됐을 만큼 가장 유명한 고전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완독한 사람도 거의 없는 소설로도 유명하다. <위대한 개츠비>는 유명세만큼이나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버전으로 출간돼 있는데 그중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버전이 있다. 김영하 작가는 역자의 말에서 개츠비를 번역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인들이 즐겨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영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졸라 재미없는 소설'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능란하게 짜인 플롯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대결하는 흥미진진한 로맨스다. 문체는 절제돼 있지만 유머도 잃지 않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죄 없는 확신범 스콧 피츠제럴드의 변호를 기꺼이 맡겠다고 결심했다. 그 변론은 결국 새로운 번역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친김에 바로 번역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 문학동네 <위대한 개츠비> 中 -
김영하 작가는 서점에 갔다가 고등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는(?) 대화를 듣고 같은 작가로서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한다. 개츠비를 대학 때 미국 현대 문학 수업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무려 원서로 읽었다!) 나도 그 고등학생들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어쩌라고. 너무 재미없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느꼈던 그때가 행복했었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인생의 쓴맛을 알아버린 지금 다시 읽은 개츠비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아, 이게 재미가 없어야 행복한 인간이라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품이란 말인가.
<위대한 개츠비>는 돈에 관한 소설이다. 로맨스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딥한 내용이다. 단순히 돈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엔 너무나 심오한, 상류사회를 향한 광적인 열망 때문에 망가져버린 인간의 이야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상류사회를 향한 열망은 21세기의 드라마, 영화, 소설, 웹툰, 심지어 동화 등등 모든 스토리를 꽉 잡은 모티브다. 개츠비는 바로 현대인의 초상인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작가인 스콧 피츠제럴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상류층 여자에게 소위 말해 처절하게 까이고 까인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경험담이 소설로 환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는 중산층 가정 출신이지만 '턱없이 높은' 야망의 화신인 어머니의 교육열 때문에 분에 넘치는 명문 사립 학교에 진학한다. 이것이 앞으로 그에게 닥칠 모든 난관의 시발점이 된다. 어머니는 아이 셋을 세 살 전에 잃고 네 번째로 품에 안은 아들 피츠제럴드를 하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며 과잉보호했다. 코만 훌쩍여도 집안이 뒤집어질 만큼 금이야 옥이야 자란 피츠제럴드는 자기가 자라온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에서 온 상류 사회 자제들과 만나면서 난생 처음 열등감을 품게 된다. 그는 그 이후 평생 여기서 생긴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피츠제럴드의 드라마틱한 삶은 상류층 자제들의 파티에서 만난 한 여학생에게서 비롯된다. 지네브라 킹으로 알려진 이 여성은 시카고 최상류층 '레이크포리스트' 출신으로, 훗날 <위대한 개츠비>의 톰 뷰캐넌이 이 지역 출신으로 설정됐을 만큼 피츠제럴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존재다. 지네브라 킹은 당연히 피츠제럴드를 배우자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지네브라의 아버지도 "가난한 남자는 부잣집 딸과 결혼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지네브라와의 몇 번의 데이트 중에 주변 상류층 친구들 사이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녀석'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자존감이 심하게 무너진 피츠제럴드는 결국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이후 그녀와의 이야기를 소재로 수많은 소설을 쓰게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다.
피츠제럴드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것도 아닌 애매한 가정환경, 깜냥도 안 되는데 어머니에 떠밀려 들어간 명문 사립에서 느낀 소외감, 굳이 반대하는 상류층 여성을 만나면서 받은 상처, 이 세 가지 결핍으로 인해 상류사회에 대한 광적인 열망을 품게 되었다. 이는 개츠비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작가의 내면적 결핍이자 작가로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동시에 파멸시키기도 한 양날의 검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