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뷰캐넌은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미국 최상류층인 시카고 레이크포리스트 출신이다. 작가 피츠제럴드의 첫사랑 여학생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톰은 스물한 살 때 이미 오를 수 있는 곳까지 다 올랐기 때문에 그뒤로는 모든 것이 그저 내리막길처럼 보이는 그런 유의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굉장히 부유했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헤픈 씀씀이로 세간의 빈축을 살 정도였지만 그는 여봐란듯이 시카고를 떠나, 남들이 보면 숨을 딱 멈출 정도로 거창하게 폼을 잡으며 동부로 옮겨왔다. 예를 들어 폴로 경기를 하겠다며 레이크포리스트에서부터 폴로용 말을 한 떼나 몰고 온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이가 그 정도로 부유하다는 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 <위대한 개츠비> 中 -
요즘 말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톰 뷰캐넌은 어마어마한 돈만 손에 쥔 게 아니라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갖춘, 현대로 치면 재벌집 아들이다. 톰의 일상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벌3세의 일상과 매우 흡사하다. 부인이 있는데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모든 사람을 자기 아래로 깔아보고, 여자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술과 향락에 빠져 지내고,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돈으로 다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톰은 가난한 탄광촌에서 주유소를 하는 남자 윌슨의 아내 머틀과 밖에서 몰래 만나는 사이였다. 그런데 데이지가 실수로 머틀을 치어죽이게 되고, 톰은 자신의 불륜이 발각될까 봐 개츠비에게 범죄를 뒤집어 씌운다. 즉, 개츠비가 머틀과 바람도 피우고 머틀을 죽이기도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데이지는 운전자가 개츠비가 아니라 자기였다는 진실을 톰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톰은 불륜죄를, 데이지는 살인죄를 각각 개츠비에게 하나씩 덮어씌운 다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뉴욕을 떠난다. 그들에게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1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최상류층, 특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기 떄문이다.
"그들, 톰과 데이지는 경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살아 있는 것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그런 다음에는 돈이나 더 무지막지한 경솔함, 혹은 그들을 한데 묶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에 숨었다.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말끔히 치우게 했다." - <위대한 개츠비> 中-
상류사회는 이런 곳이다. 상류사회는 남의 인생을 망가뜨려도, 살인을 해도, 없던 일 칠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해서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개츠비도 돈은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상류사회는 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모종의 허들이 있는 세계다. 영화 <베테랑>이나 드라마 <밀회>에서 묘사되는 상류사회의 모습도 이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베테랑>에서는 조태오가 사람을 때려 죽이고도 사고사로 위장하고, 그게 발각될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부하직원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행을 자진한다. 돈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음은 당연하다. <밀회>에서는 재벌가와 법조가문이 사돈을 맺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자기들이 저지른 셀 수 없는 크고 작은 범죄들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책임지도록 역시 돈을 주고 해결하려는 모습이 나온다. 두 작품에서 회장님의 죄를 대신 쓰는 역할을 하는 두 인물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병적인 열망에 휩싸인 사람이다.
개츠비의 경우를 보자. 무일푼 군인이었던 개츠비는 어떻게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뉴욕 웨스트에그에 대저택을 보유한 갑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성취다. 그는 자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데이지(로 대변되는 상류사회의 특권)를 되찾기 위해서 온갖 불법을 일삼았다. 갱단 두목 울프심과 손을 잡고 밀주 사업을 크게 벌였고, 과거 출신과 학력, 경력을 위조했으며, 일일히 밝힐 수 없는 수많은 범죄에 발을 담갔다. 사람들은 개츠비가 살인을 한 적도 있다고 쉬쉬대며 말할 정도였다. 인간 이하임을 스스로 자처하며 미친 놈처럼 불법을 저질러야 간신히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올라 이제 꿈을 이루나 싶었지만 사실 개츠비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상류사회에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다. 상류사회로 대변되는 톰 뷰캐넌과 데이지가 그를 그들과 같은 부류로 절대 인정해주지 않았다.
"어디서 굴러먹던 누군지도 모르는 작자가 자기 마누라를 집적거리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요즘 사람들이 가정생활과 가족제도를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음에는 앞뒤 안 가리고 모든 걸 다 팽개치고 백인이 흑인하고 결혼하는 시대도 곧 오겠구만."
"데이지는 가지 않아! 손가락에 끼워줄 반지도 어디서 훔쳐야 되는 소문난 사기꾼한테는 절대 아니지."
- <위대한 개츠비> 中-
상류층이 아닌 사람은 그냥 흑인으로 보는 톰 뷰캐넌의 사고방식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유전자에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뜯어고칠 수 있을까. 잊을만하면 뉴스를 장식하고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특권계층의 비리나 잘못들. 어쩌면 그들의 잘못이 아닌지도 모른다. 잘못이라면 그냥 그런 환경에서 태어날 때부터 나서 자란 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슬픈 건 극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한 우리들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평범한 사람은 꿈도 꿔보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누리고 산다. 개츠비와 톰을 비교해 보자. 개츠비는 소년 시절부터 새벽잠 줄여가며 공부하고 배우고 운동하고 일하며 성공을 준비했다. 톰은 가만히 있으니 스무 살에 이미 모든 걸 이루어 인생이 시시해져 버렸다. 누가 억 소리 나는 건물을 척 샀다는 이야기,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누구집 자제가 주식을 얼마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은 콩나물 값 아껴 가면서 동네 슈퍼 여러 곳 돌아다니면서 알뜰하게 사는 우리 모두의 의욕을 푹푹 꺾어 놓는다. 그럼 개츠비처럼 작심하고 노력하면 상류층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상류사회는 안타깝지만 그들만의 세상이라 노력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개츠비가 산 증인이다. 그런데 슬픈 건 그럼에도 그곳을 향한 동경을 품는 게 또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이다.
개츠비는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평생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 목숨 걸고 싸우고, 범죄 집단과 손을 잡고, 정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걸 갖고 있는 남자와 함께 사는 걸 곁에서 고통스럽게 지켜보면서 온갖 수모와 고뇌와 번민 속에서 죽을둥살둥 만들어 놓았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