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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Oct 30. 2022

위대한 개츠비 (4)


<위대한 개츠비>를 이야기할 때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를 만나면서 겪은 일들을 독자에게 이야기해주는 화자 역할이다. 앞서 작가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경험담을 개츠비로 재현했다고 말했는데, 닉 캐러웨이 또한 피츠제럴드의 분신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닮아 있다.


닉은 피츠제럴드처럼 중서부 출신에 예일대 문학도였고 학창시절 글 좀 썼던 인물로 나온다. 데이지와는 사촌지간이고 톰 뷰캐넌과는 대학 동기이다. 닉은 우연히 개츠비의 대저택 옆집으로 이사오면서 개츠비를 만나게 된다. 닉이 데이지의 사촌 오빠라는 걸 알고 접근한 개츠비가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닉은 처음에는 파티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개츠비라는 미지의 인물을 추측하다가 그를 직접 만난 순간 바로 호감을 느낀다.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안도감을 주는,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드문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한 뒤(혹은 직면한 듯),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 <위대한 개츠비> 中-



개츠비의 이 미소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손꼽히는 장면이다. 디카프리오는 아마도 이 미소를 원작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거울 보고 수백 번, 수천 번 이상 연습했을 것이다. 사람의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개츠비의 이 백만불짜리 미소는 작품 뒤에도 몇 번 더 등장하는데, 개츠비는 이 미소 덕분에 닉에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닉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일례로 데이지의 고향 동생이자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와 썸을 타게 되는데 단 몇 번의 만남으로 그녀의 '거짓말쟁이' 본능을 알아차린다.



"조던 베이커는 본능적으로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을 피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규범을 일탈할 기회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에서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정이 불가능한 거짓말쟁이였다. 그녀는 작은 손해도 견디지 못했고, 따라서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을 향해 냉담하고 거만한 미소를 짓는 동시에 그 단단하고 활기찬 몸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中-



톰과 데이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예리하게 그들의 인간됨을 간파했다.



"그들의 관심에 나는 약간 감동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와 그렇게 동떨어진 대단한 부자는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혼란스럽고 조금 역겨웠다. 데이지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어린애를 안고 집을 뛰쳐나오는 것일 테지만, 아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 톰으로 말하자면, 책 한 권 때문에 우울해졌다는 것보다는 '뉴욕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편이 훨씬 더 어울렸다. 강건한 육체에 대한 자만심만으로는 더이상 독단적 성품을 유지할 수 없다는 듯." - <위대한 개츠비> 中-



톰, 데이지, 조던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추악한 본성은 진작부터 간파한 닉이 개츠비를 좋게 봤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닉은 톰의 불륜에 본의 아니게 공모한 꼴이 되면서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의 뻔뻔스러움에 혀를 내둘렀고,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개츠비, 데이지, 톰의 삼자대면 자리에서 개츠비를 구석에 몰아넣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과도하게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학을 뗀다.



"톰은 신이 나서 쉴새없이 웃으며 떠들어댔지만 그의 목소리는 보도의 낯선 소음이나 고가도로 위의 법석만큼이나 나나 조던에게는 멀게 느껴졌다. 인간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비극적인 다툼이 도시의 불빛 너머로 사라지는 것에 만족했다." - <위대한 개츠비> 中-



스무 살에 이미 모든 걸 다 가져봐서 세상이 시시한 나머지 모든 사람을 자기 아래로 깔아보고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대놓고 만나는 톰, 남편의 사랑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남편이 가져다주는 안락함과 돈의 맛을 놓지 못해서 우울감을 숨긴 채 행복한 척 연기하는 데이지. 닉에게는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돈으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그들보다는, 마피아 패거리와 손을 잡고 불법적이지만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부자가 된 개츠비가 차라리 더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닉은 실수로 사람을 치어 죽인 데이지의 죄를 개츠비가 뒤집어 쓰려는 걸 알았고, 창문 틈으로 엿본 데이지와 톰의 다정한 뒷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공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전화할 일은 절대 없다는 걸 차마 개츠비에게 말하지 못한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기를 선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츠비의 집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고 출근 시간에 맞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놓던 닉은 개츠비에게 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꼽은 <위대한 개츠비> 최고의 명대사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그 말을 들은 개츠비는 닉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예의 그 멋진 미소로 화답한다. 그들의 우정은 문학사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그려진 어떤 우정보다 더 진하고 슬프고 처연하고 가치 있는 우정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널 알아. 이렇게 말해주는 우정.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선균이 아이유에게 해주는 말. 그냥 내가 널 알아.



나는 <위대한 개츠비>는 피츠제럴드가 자아를 두 개의 페르소나, 즉 닉과 개츠비 두 사람으로 분리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상류층의 일원이 되고 싶다)과 자신이 못해봤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고 그 과정에서 느낀 절망까지를 대표하는 개츠비와, 그런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닉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피츠제럴드는 평생 돈에 허덕이며 술독에 빠져서 살았다. 상류사회 여성에게 차인 뒤 젤다라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부잣집 딸과 결혼했는데 아내의 허영을 맞춰 주기 위해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는 아내 젤다의 정신병, 재정적 어려움 실패자라는 자기 혐오, 부자들의 세계에 대한 환멸 등을 껴안은 채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했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해서 술로 망가져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한 불운의 작가였다. 20대에 일찍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열에 올랐지만 사망할 즈음인 44세에는 거의 잊혀진 작가였고 가까웠던 인간관계가 전부 틀어졌고 세간의 욕도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피츠제럴드는 닉이라는 화자를 통해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의 명대사에서 그는 누구도 자신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을 닉의 입을 통해서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거라 생각하고 싶다. 그의 마음을 알겠다, 그냥.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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