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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Oct 30. 20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4)


하지만 폴은 잡힐 듯 잡히지 않습니다. 그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같이 식사를 하고 스킨십을 하지만 폴은 그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아요. 그녀의 밀당에 시몽의 가슴은 타들어갑니다. 시몽은 그녀의 차분하고 평온한 겉모습에 감추어진 불행과 고독을 보았고 마치 자신을 어루만지듯 폴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으로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몽의 엄마가 아들과 폴의 관계를 눈치 채고 간섭하려 들고,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자신의 어떤 면이 혐오스러웠던 그는 엄마에게 간섭하지 말라며 덤벼들어요.(아, 가운데 여자가 낀 아들과 엄마의 관계란!) 엄마는 초강수를 두어 디너파티에 폴을 초대합니다. 시몽의 엄마가 마련한 그 자리는 또다시 시몽이 폴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치 시몽과 폴의 첫 만남 때처럼 말이죠. 로제는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고 배신감과 함께 버려진 폴이 갑작스럽게 시몽에게 키스하며 결국 둘 사이는 잠자리를 함께 하는 깊은 관계로 급진전됩니다. 지금껏 사귀어 온 여자들과는 내밀한 관계를 거부해 온 시몽은 폴에게 자기 어머니(또 엄마!)에 관해, 여행 취미에 관해, 미국에 관해, 등등 수많은 것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싶어져요.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떠세요? 요즘 드라마의 남녀 관계와 전혀 다르지 않지 않나요?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심리는 10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지금도 똑같은가 봅니다.




행복에 겨운 시몽은 온종일 일도 안 하고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만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삶의 모든 화살표가 오직 그녀만을 향해 있는 '행복한 몽유병자' 처럼 행동해요. 그러나 로제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여전히 로제에게 흔들리는 폴의 모습에 시몽은 술에 빠져 괴로워합니다.(이것도 많이 본 클리셰!) 그리고 그것이 폴로 하여금 시몽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게 만들죠. 안타깝습니다. 폴이 시몽에게만 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시몽은 폴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 세상 위스키를 전부 마셔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며 힘들어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 언젠가 당신이 나를 쫓아내리라는 것을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뿐이야. 그런데도 몸을 웅크린 채, 때로는 희망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뿐이라고.... 그게 가장 견디기 어려워. 때로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게 말이야." -p131-




이토록 괴로워하는 시몽 앞에서 폴이 보인 행동은 이미 둘의 관계가 파경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엄마와 아들 같은 연인 사이라니! 폴은 그게 불가능한 여자인데.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심시키려 애쓰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몽,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당신은 미쳤어....... 당신은 정말 어린아이 같아.... 자기, 내 가엾은 자기....." 그녀는 그의 이마와 두 뺨에 키스했고, 순간적으로 그런 자신이 마침내 모성의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 안의 무엇인가가 고집스럽게 지금 시몽이 느끼는 일반적이고 오래된 고통을 달래주는 일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p132-




엄마처럼 자신을 달래주는 사랑하는 여자. 그녀의 손길에 안정을 찾은 시몽은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폴이 시키는 대로 출근을 하고 늦게 퇴근해서 바쁜 척 보이기 위해 저녁에 두 시간 넘게 게임을 하고 들어옵니다. (철 없는 연인!) 심지어 그 사이 엄마 집에 들러서 돈을 빌리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시몽은 한순간도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몽은 폴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요. 그냥 열심히 살면 될 것을, 이 철없는 것! 책 속으로 들어가서 시몽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네요. 폴과 시몽이 상대에게서 원하는 바가 자꾸만 어긋나요. 연인들이 헤어지는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모습이 참 안타깝네요.




폴의 고통을 알아봐주고 그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시몽은 도저히 좁힐 수 없었던 간극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어릴 적 지내던 시골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던 폴에게 야한 드레스를 입혀서, 남들 눈에 띌까 봐 동네 작은 식당들만 전전하던 폴을 데리고 야밤의 나이트클럽에 가서 대놓고 춤을 춘 겁니다. 거기서 주변 사람의 쑥덕거림 때문에 급기야는 폴이 무의식 속에 꾹꾹 눌러놓았던 열등감(주로 나이에서 오는)이 폭발해버려요. 시몽은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나이 차이가 폴에게 그토록 큰 문제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둘 사이의 문제는 로제뿐이라고 강조해요.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른 거죠.



시몽은 작심하고 로제 이야기를 꺼내며 둘의 관계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가 하자는 대로 따라올 것을 요구한다. 시몽으로서는 폴을 차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자 나이가 어린 데서 오는, 생각이 없거나 얕을 거라는 나름의 약한 인상을 깨부수고 싶은 적극적인 시도였어요. 당신은 내게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야.(p141) 처음으로 보인 자신의 주체적인 모습에 그는 자부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느끼죠. 와... 이 작품은 사강이 스물넷에 쓴 소설인데 스물넷 짜리 아가씨가 젊은 남자의 심리를 어쩌면 이다지도 절묘하게 그려낼 수가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자.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의 단호함에 대해 자부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p141-




시몽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주체적인 문제 해결. 내가 과연 그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로제를 저렇게도 떨쳐내지 못하는 폴을 내게로 데려올 수 있을까.




시몽은 때때로 자신이 힘들고 무용하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흐르는 시간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로제와의 추억이 아니라 폴 안에 있는 로제라는 그 무엇, 그녀가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뿌리 같은 그것이었다. 이따금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줄곧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고통을 감수하는 그 한결같은 태도 때문이 아닐까 자문했다.  -p143-




시몽은 이 관계가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시몽은 그녀에게 의존적으로 대했고 모든 것에 충고를 구했어요, 안 그러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시몽은 그런 남자예요.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헛되다는 걸 모르지 않을 만큼 폴과의 관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걸 넘어설 만큼의 주체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폴은 로제와의 재회 이후 시몽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시몽은 폴에게 다시 잘해보자고 매달리지 않아요. 사랑에 격렬하게 빠졌듯이 이별의 슬픔에도 온전히 빠져서는 그 슬픔에 충실한 채 폴을 영원히 떠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저는 시몽이 어디로 갔을지 그 이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다시 엄마의 집으로 갔을 거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엄마 집에 얹혀 살던 철 없는 스물다섯짜리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이 끝나고 어디로 가겠어요. 물질적으로 심리적으로 엄마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시몽은 난생 처음 그런 자신의 껍질을 깨고 싶게 만들어준 폴에게 자석처럼 끌렸지만 상대가 열 네살이나 연상의 여자였던데다가 그 여자의 성격이 이 정도의 나이차를 극복할 만큼 파격적이지도, 그만큼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탓에, 무엇보다 시몽이 그걸 타파해보려는 '어른스럽고 의미 있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다시 '어린 남자'로 남게 됩니다.



시몽은 왜 그녀를 붙잡지 않았을까요. 관계에서 줄행랑을 치는 데 익숙했던 자신의 본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속된 말로 시몽은 좀 더 커야 해요. 어쩌면 폴은 시몽이 처음에 그랬듯 자신을 강력하게 붙잡아주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시몽은 엄마 집으로 돌아가 결국 로제에게서 폴을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폴을 만나기 전에 그랬듯이 매일 직장에 지각하고 엄마 돈을 빌려 쓰면서 남은 20대를 보내리라 생각됩니다. 영화라면 '10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면도를 하지 않아 거무스름하고 초췌한 시몽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폴을 그리워만 하지 않을까 멀리까지 괜히 내다보았습니다.



그런 남자가 있습니다. 행동하지 못하는 남자. 사랑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남자. 여자의 심연이 그렇게 얕았다면 이 세상 수많은 스토리가 탄생하지 못했겠죠.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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