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염장을 지른 이유를 알고 있다.

우리 팀 이야기 /w music

by 강재훈
염장(鹽藏): 소금에 절여 저장함.


염장을 지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만히 있는 속을 들쑤시어 괴롭고 힘들게 하다.
(필자의 정의) 염장샷: 염장 + (photo) shot, 사진이나 영상을 보내 다른 사람이 부럽게 하거나 그의 속을 들쑤시다.


염장샷은 소셜미디어가 대중화되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과 영상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기막힌 단어다. 남들의 일상 속 즐거움이 듬뿍 담긴 사진을 보노라면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속으로 아무리 외쳐도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단박에 문을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면 그 부러움은 정말 속을 들쑤시는 괴로움으로 승화된다.

내가 팀장을 맡고 있는 마케팅팀 멤버들은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염장샷을 자주 시전 한다. 평소에는 공연 관람, 생일파티, 맛집 방문 같은 일상의 즐거움이 밝은 표정으로 담겨 전해져 온다. 사실 여기까지는 즐거움을 나누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염장샷이 되고 만다.

'아놔... 빨리 마치고 퇴근해야겠다. ㅠㅠ'


그래도 이건 염도가 낮은 아기 같은 염장샷이다. 지난여름휴가 시즌 때는 곳곳의 여행지에서 먹은 맛깔스러운 음식과 산과 바다의 멋진 풍경, 행복한 표정이 담긴 셀카 사진이 뭉터기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 사진을 사무실에서 보게 된 멤버들은 비로소 염장샷의 위력을 실감했다. 최근에 베트남에서 지은이 보내온 사진이 그러했는데, 코로나로 해외여행에 발이 묶인 멤버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아니 염장을 질렀다.

지은의 염장샷 - Nha Trang, Vietnam

지은은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멤버였다. 그런 그녀가 해외에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 듯 그녀는 무사히 돌아왔고 아프지도 않았다.


해변의 여인


쿨(COOL)

그렇다. 여름은 염장샷의 계절이다. 90년대 가요가 이를 중명한다. 우리 팀의 염장샷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혼성듀오 쿨(COOL)의 '해변의 여인'이 염장샷의 부작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요즘의 가요에 비해 촌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재미있는 가사와 흥겨운 댄스풍은 그야말로 여름에 딱인 epic 같은 곡.


쿨(COOL) - 해변의 여인 MV
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안에만 처박혀있어. 안 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버려
...
사랑을 위한 여행을 하자. 바닷가로 빨리 떠나자. 야이 야이 야이

누가 제대로 염장을 질렀나 보다. 이십 대를 보내고 있는 여성이 여름날에 방안에만 있으면 미치지 않겠나. 게다가 남자 친구가 멀쩡하게 있는데 말이다. 반나절만 집에 있어도 죄짓는 느낌이 드는 나는 확실히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여자 친구가 짜증과 애교가 뒤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니 남자 친구가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갔나 보다. 여성 보컬 유리의 짜증과 애교가 섞인 목소리, 남성 보컬인 재훈의 경쾌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 더 염장이 실감 난다. 그런데 가사 뒷부분이 반전이다.


어디 갔어? 이 밤중에. 도대체 난 이해가 안 돼.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 버려두니!
해변에서 만난 여인 많은 얘길 들려주었지.

여자 친구 달랜다며 함께 여름 바다에 놀러 와서 여자 친구를 또 혼자 남겨두고 다른 여인의 얘기를 들었다고? 이건 범죄다 싶다. 처벌만 없을 뿐이지 욕 꽤나 먹을 만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곡이 워낙 여름에 신나게 듣는 대표곡이라 그 여성으로부터도 이 가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스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름이야기


DJ DOC

비슷한 여름의 염장 곡이 있다. 남자라면 누구나 로망이 있을 법한 여름 휴가지 로맨스가 담긴 DJ DOC '여름이야기'이다. 이 곡을 들으면 언제나 떠나고 싶었을 정도로 필자에게는 염장 곡이다. 4/4 박자의 경쾌한 리듬, 탬버린 등 타악기와 기타음이 여지없이 신나는 여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애절한 가사도 잘 어울린다. 참고로 DJ.DOC는 세 명으로 구성된 갱스터 힙합 그룹인데, 반항아 콘셉트임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에는 꽤 신나는 댄스곡들을 많이 발표했었다. 그리고 이 곡이 인기를 끌면서 '겨울이야기'도 발표되어 역시 인기를 끌었다. 제목들처럼 그 계절에 있을 만한 스토리를 감성적으로 담은 명곡들이다.


DJ DOC - 여름이야기 MV


왜 이 곡이 염장 곡이냐면 남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건드리기 때문이다.

지나간 여름.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
별이 쏟아지던 하얀 모래 위에 우린 너무 행복했었지.

완벽한 시추에이션이다. 여름에 바닷가에 간 것도 그저 신나는데 까만 생머리의 그녀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90년대 감성으로 볼 때 이 가사 속 녀석이 부럽지 않았던 미혼남성은 없었다고 본다. 어쨌든 이 부분이 이 곡의 염장 포인트다.


돌아온 서울에서 널 찾을 수가 없었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가을 겨울 너를 찾아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었지.

이 부분은 염장이라기보다 안타까운 공감 정도라 하겠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고 삐삐가 대세 통신수단이었는데, 행여 그녀의 번호를 알고 있어 삐삐를 보내더라도 그녀가 전화를 주지 않았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가사의 맥락을 보면 그녀는 삐삐가 없었거나, 미쳐 번호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 날 달래준다고 그 바닷가로 다시 오게 됐어. 청천벽력 날벼락!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내가 사준 선글라스 목걸이 그대로인데 단지 틀려진 건 내 친구와 함께라는 것.

염장이 공감을 넘어 몰입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달래준다고 왔더니 그녀가 내 친구 옆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거다. 진퇴양난이고 사면초가다. 집으로 돌아갈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놀자니 억장이 무너질 테니까. 몰입의 절정은 선글라스와 목걸이에 있다. 그녀가 왜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왔을까? 그녀도 여름이 되면서 녀석을 추억하고 있었던 걸까?


주책없는 내 친구 그녀가 그녀인 줄 모르고, 내 지난여름 얘기를 마구마구 해버린 거야. 고개 숙인 그녀가 펑펑 울었고 나도 울고 하늘도 울고. 아~ 슬프다.

가사에 집중했다면 분명 이 부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영화 같지 않은가?



夏の理由 (여름의 이유)


여름은 무덥다. 사실 그래야 맛이다. 유독 여름에 휴가시즌이 있는 이유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면 여름만큼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계절이 없지 않은가? 여름이 있는 이유는 무더위를 피해 즐기는 변칙적인 일상에 있고, 그것이 카메라에 담겨 염장샷이 된다. 이렇게 염장샷은 여름의 한 이유가 되었다.

염장샷을 수백수천 장 찍었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마련. 지금처럼 늦여름이자 초가을에 즐겨 듣는 곡이 있다. Gontiti의 '夏の理由(여름의 이유)'는 불과 2분의 짧은 시간에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는 내 기분을 모두 담아 들려준다.


Nippon TV 드라마 <おとなの夏休み (어른들의 여름휴가) Original Soundtrack


Gontiti - 夏の理由


Gontiti는 1983년 데뷔해서 2000년도를 거쳐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일본의 뉴에이지 듀오인데 잔잔하면서도 리드미컬한 통기타 사운드가 매력적이라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에서 그들의 곡을 많이 들을 수 있다. 감정을 가볍게 끌고 가서 일까? 그들의 곡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지겹지 않다. '해변의 여인' 노랫말처럼 여름에 방안에만 처박혀있어도 잔잔한 기타 선율의 느낌에 염장 당할리 없다.



"팀장님, 톡으로 염장샷 보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내가 원하는 거예요"

옆자리에 있는 팀의 선임인 은선이 거든다.

"덕분에 간접 체험하게 많이 보내줘요"


지난여름은 코로나로 인한 통제가 조금 풀리면서 유독 염장샷이 많았던 것 같다. 국내외로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반면 여전히 발이 묶여 있었던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염장의 효과가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내년에는 부디 편안하게 여름의 이유를 느끼고 즐겨, 모두가 염장샷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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