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내가 초등학생, 아니 정확하게 국민학생이던 시절 가장 유명한 한국의 밴드는 누가 뭐래도 송골매였다. 잘생긴 보컬 구창모와 개성 넘치는 기타리스트 배철수로 대표되던 펑크록 밴드였는데, 아마 가장 유명한 곡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아닐까 싶다.
송골매 - 어쩌다 마주친 그대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두 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사실 어쩌다 마주쳤는데 마음을 빼앗기는 건 소위 '금사빠'일 거다. 온오프라인으로 만남의 기회가 많아진 요즘은 어지간해선 한 번에 마음을 주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번 얘기의 주인공은 어쩌다 마주칠 경우 마음을 뺏길만한 여우 같은 두 눈을 가진 우리 팀 막내 예진 주임이다.그리고 나는 어쩌다 그녀를 아주 진짜 어렵게 만났다.
우리 회사에는 채용연계형 인턴제도가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실시되던 공채 제도를 대신하는 것인데, 3개월의 인턴기간을 거쳐 적합한 경우 신입 정규직원으로 채용하는 제도이다. 2021년은 우리 팀에 똘똘하고 센스 있는 막내가 필요했기에 -사실 팀원들이 모두 똘똘하고 센스 있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하므로- 내 보스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추진했었다.
마케팅은 문과계열 학생들이 지원하기 무난해서 인기가 높은 분야인데, IT회사의 마케팅이니 기대가 더높아진 걸까? 단 1명을 선발하는데 서류 지원자가 너무 많아 그 수를 모르겠고, 1차 면접대상자는 대략 20명이 넘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면접관으로 참석했다. 그때 나는 새 식구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면접을 거듭할수록 점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취업이 어렵다는데 얼마나 간절할까? 얼마나 힘들까?'
나는 그들의 기대에 찬 눈빛에 가려진 압박감과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고, 이것이 내 양심을 자꾸 찔러댔다. 선배로서 더 많은 기회를 만들지 못한 사회적 양심과 내 아이들이 곧 저 자리에서 간절히 누군가를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개인적 양심이 뒤엉켜 우울한 호르몬을 자꾸 뿜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 감정에 지배되어 혼자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모든 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선발된 인턴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팀원 모두 반가움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세한 것은 밝히지 않겠지만 소위 말하는 스펙도 좋았고 인상도 좋았다.
그녀와 우리가 일과 교육으로 두 달을 함께 보낸 후 인턴 활동에 대한 최종 평가서를 작성하는데 그녀가 작성한 자기 활동 리포트를 읽으며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스스로 IT를 잘 안다고 표현한 부분이었다. 사실 그녀는 IT전공이 아니었고 기술적인 이해나 지식은 매우 얕은 상태였다. 다만, 여러 인턴 과정을 통해 B2C 시장의 동향을 이해하고 모바일 서비스의 아이디어를 내는 정도였는데, IT를 잘 안다는 표현이 오해를 만들 수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나아가 자신의 현재 위치와 능력을 정확히 아는 것이 향후 정식 입사 후 직무역량을 개발해가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수준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나에게 카톡 메시지 몇 문장을보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황당했다. 그렇지만 곧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맞지 않았을 뿐... 하지만 팀원들은 모두 적잖은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멘토로 활동한 진웅 책임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으나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막내를 맞이 하기 위한 한 차례의 홍역을 치렀다.
그리고 다시 인턴 정기 채용의 시기가 돌아왔다. 불과 반년 전, 나는 인턴제도를 통해 팀에 신입사원을 확보하려다 실패했었다. 그래서 다시 추진할 명분이 부족했다. 고민했다. 팀원의 업무부하를 낮추고, 우리 사업 본부의 확장과 비전을 만드는데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기에 인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고민 끝에 결론을 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품의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진을 어쩌다 아주 겁나게 어렵게 마주치고 있었다.
북극여우
면접 때 만난 예진은 모든 질문에 차분하게 듣고 답했다. 오버하지도 않아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짧지만 해외 IT기업,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이 몇 개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녀의 전공이다. 요즘 대학의 학과와 전공 이름은 예전처럼 명확하게 뭘 배우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그녀의 전공도 그러했다. Entrepreneurship 전공. 기업가 정신과 필요 역량을 공부했다면 아마 경영학을기본으로 창업에 필요한 실무적인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지인 중에 기업인으로서 존경하는 분이 있다. 그분은 대학 재학 때부터 준비하여 졸업 후 창업, 매년 수백억 대 매출과 높은 이익을 내는 IT기반 서비스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회사를 외부 자본에 매각한 후 다시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고 지금도 성장시켜가고 있다. 그분이 늘 사용하시던 단어가 Entrepreneurship, 즉 기업가 정신이다. 그리고 나 또한 창업과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예진의 전공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예진은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서 보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들은 아니라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직도 물어볼 것이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광활한 대륙에서 자라서일까? 또렷하고 큰 눈으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여우를 닮았다. 그녀는 북극여우의 눈과 표정을 가졌다. 겉으로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데 속으로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예진은 내성적인 성격에 가깝다. 반면 대화를 해보면 성장하고 싶은 야심도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이를 입증할만한 일이 있었다. 그녀와 한 유닛(우리 팀은 2명을 유닛으로 구성하여 서로 협업하고 백업하도록 한다)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임인 현서 책임을 당황하게 한 사건인데,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를 예진이 맡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재미와 장난스러운 대화에서 나온 말이지만, 언중유골이라고 본다. 예진은 독립적으로 일을 주도해보고 싶어 하는 MZ세대이니까.
스트릿우먼파이터 - 아시아투데이
댄싱 키즈
예진이 인턴으로 입사했을 때 예능 프로그램 스우파의 인기가 절정이었다. 댄스의 프로들, 특히 여성 댄서들이 강렬하고 치명적인 춤 실력을 뽐내며 마치 싸우듯 경쟁하는 상황이 무척 재미있어 나는 모든 편을 시청했었다. 당시 나의 최애 댄서가 리정 -> 노제 -> 리헤이 -> 시미즈로 3번이나 바뀔 정도로 팬심이 가득했었는데, 나는 심지어 스트릿댄스를 배우고 싶어 주변의 댄스학원과 레슨 중개 플랫폼을 기웃거리기도 했다(지금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벌여둔 취미가 많아 자중하는 중).
예진은 인턴으로 입사하기 전부터 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요즘도 열심히 댄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데, 주말에는 하루에 서너 시간씩 출 정도로 댄스에는 진심x진심이다. 그리고 그녀가 열심히 땀을 흘리고 온 다음 날은 확실히 눈에 총기가 돌고 의욕이 밖으로 표출된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버린 후 에너지를 충전하고 오니 그녀에게 댄스는 딱 맞는 취미인 것 같다. 은선 책임도 취미가 댄스이니 쿵작이 잘 맞는 팀이 되는데 분명 댄스가 기여할 것 같다. 그리고 최근 릴스에 폭발적으로 관심이 생긴 은선 책임이 팀에도 뭔가 댄스 비슷한 활동을 요구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댄스가 팀에서 주류문화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이무진. 비긴어게인
신호등
요즘 이무진의 신호등이란 곡이 여전히 인기다. 포크송 같은 분위기에 펑키한 스윙 리듬이 무척 세련된 곡이라 나도 요즘 자주 듣는다.
이무진 - 신호등
그런데 표절 논란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은 많은 작곡가들이 코드 패턴부터 잡은 후 멜로디와 사운드를 입혀가기 때문에 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이 꽤 있다. 그래서 인기곡일수록 표절 논란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초보는 다른 이들의 곡을 듣고 분석하면서 실력을 키우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한 채 비슷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주의해야 할 일.
그런데 이건 직장도 마찬가지다. 동료로부터 전달받은 정보, 자료와 경험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면서 업무를 익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부터 '우리 사업은 이러이러하고 당신의 역할이 저러저러하니 스스로 잘해보세요'라고 역할을 받는다면 경력자라고 해도 만족스럽게 잘 해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입사원의 경우 주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예진은 계속 멘토가 있었다. 인턴기간 동안 경희 책임이 특유의 쾌활함으로 그녀를 도왔으며, 신입사원이 된 후에는 '(내 일에만) 집중의 여왕' 현서책임과 유닛을 이뤄 기적적으로(!) 서로 도우며 일하고 있다. 사실 두 사람뿐 아니라 팀원 모두가 그녀의 자리매김을 돕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리를 잘 잡아야 협업하는 팀원들에게도, 신입 채용을 주장했던 나에게도 좋으니까.예진은 선배들의 결과물들을 얼마든지 표절해도 된다.
신호등의 가사는 예진과 같은 사회초년생들의 마음을 초보운전자가 도로 위에서 겪는 심정에 비유해서 꽤 재미있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지만 가려한 날 막아서네 난 갈 길이 먼데 새빨간 얼굴로 화를 냈던 친구가 생각나네 이미 난 발걸음을 떼었지만 가려한 날 재촉하네 걷기도 힘든데
맞다. 예진은 아직 걷기조차 힘들 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응원하면서 도울 것이다. 그런데 나, 아니 우리 팀원들이 예진에게 기대하는 미래의 모습은 걷는 것이 아니라 잘 뛰는 모습이다. 그들이 지금 그렇게 잘 뛰고 있으니까 그녀도 함께 뛰어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촉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아주 어렵게 만난 우리의 그녀가 혹독한 북극의 추위를 이겨내는 여우처럼 스스로 영리하게 무언가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