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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명랑 Sep 05. 2024

방년 48세 비만소녀 탈출기 10

제10화 희균 씨와의 첫 만남 

드디어 희균 씨를 만나기로 한 당일날. 당일이 되고 보니 왠지 나가기가 싫어졌다. 닥치기 전에는 이런 저런 생각에 들뜨다가도, 막상 당일이 되면 밖에 나가기 싫은 건 내 모양새에 자신이 없어서다. 희균 씨가 내 모습을 보고 진저리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여의도 사건 이후에는 무슨 옷이든 옷을 입는 게 불안하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청바지에 남방을 대충 걸친 뒤 보리를 데리고 홍제천 앞에 나갔다. 약속 장소엔 벌써 희균 씨가 나와 있었다. 소개팅 앱에 사진이 올려져 있었기에, 한눈에 그인 줄 알아볼 수 있었다. 보리는 검정 강아지인데, 그가 데려온 강아지는 크림색이었다. 같은 말티푸라지만 모양새가 영 달랐다. 아마도 푸들과 말티즈가 섞인 비율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었다. 


희균 씨는 사진보다 실물이 더 멋있는 사람이었다. 사진으로는 얼굴만 볼 수 있었는데,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인지 몸도 늘씬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키도 178에서 180 정도 되는 큰 키였다. 짙은 카키색 바지에 연핑크빛 스웨터를 입고 나왔는데, 특별히 꾸민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엄청 젊어보이게끔 했다. 나이도 나보다 네 살 적지, 키도 크고 얼굴은 이선균이지, 이리저리 봐도 나랑 계속 만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오늘 하루만이라도 즐기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홍제천변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아들이 군대에 가서 지금은 혼자 강아지와 산다고 했다. 그의 직업은 IT 계열. 대기업으로 나가서 IT 관련 설치도 하고 점검 서비스도 하는 회사라고 했다. 그가 프로필에 연애할 사람을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적어놨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지난 번에 문자로 말했듯이, 나는 사실 연애할 마음이랄까, 여하튼 연애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상관없다고 쿨하게 말했다.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있어서, 그저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그도 소개팅 앱을 깐 것은 얼마 안 되었고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믿고 싶었다. 


희균 씨의 강아지 이름은 노루였다. 강아지 이름으로 특이해서 어찌된 거냐고 물었더니, 노루궁뎅이버섯을 좋아해서 거기서 따온 거란다. 우리나라에선 개나 고양이 이름은 먹는 걸로 해야 오래산다고 믿는 습관이 있어서, 대체로 다 먹을 걸로 이름을 짓는다. 그래서 나도 보리라고 지은 것이다. 보리와 노루. 왠지 잘 어울리는 이름 조합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보리와 노루는 서로 모른 채했다. 특히 보리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어찌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지, 산책을 하는 건지 계속 꼬이는 줄을 푸느라 내가 정신이 없었다. 반면에 노루는 이미 산책을 많이 해본 양 가지런히 걸어다녔다. 노루는 보리가 좋은지 가까이 가려 했지만, 보리는 노루를 멀리 했다. 확실히 내가 산책을 자주 시키지 않아서 사회성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뚱뚱한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지레 짐작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사실이기 때문에 익숙해진 것이기도 하다. 이해를 전혀 못할 바는 아니다. 아무래도 뚱뚱한 사람은 보기에 예쁘지 않으니까. 남들에게 소개하기도 그렇고, 같이 다니기에도 부끄러운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뚱뚱한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건 사실 너무하다. 요즘엔 자기관리가 대세라서 그런지 몰라도, 뚱뚱한 사람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 죄를 지은 양, 어디서든지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있어야 한다. 조금만이라도 크게 말한다거나 나서서 움직이면, 뚱뚱한 사람이 나댄다고 한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뼈가 굵고 체격이 큰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소화력이 딸리기 때문에 아무리 관리를 해도 허리살이 붙기 마련이다.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숱한 아줌마들을 보라. 그 아줌마들의 허리가 퉁퉁한 게 다 자기관리 부족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희균 씨와의 대화가 점점 재미있어지면서, 그를 좋아하게 될까봐 벌컥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희균 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은 아니지 않니. 오늘은 첫날이고 예의상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어주는 것일테다. 평범한 한국 남자라면 그도 결국 내가 뚱뚱해서 싫다고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상처를 받고… 나는 만화책에서 나올 법한 이 빤한 스토리가 너무 싫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더 깊이 상처를 받기 전에, 차라리 이쯤에서 정리를 하기로 맘을 먹고 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상형이세요?”

“이상형이요? 이 나이에 이상형이 어딨어요. 착하고 말이나 잘 통하면 좋죠.”

“그래도 예컨대… 기준이 있으실 거잖아요. 제가 소개팅 앱에 보니, 자기관리 잘 하는 여자를 찾는다고 써놓으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자기관리 잘 하는 분들이 멋있죠. 현정님도 자기관리 잘 하시는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자기관리에 완전히 잼병이에요. 자기관리를 잘하면 제가 이런 몸이겠어요?”

“만금님 몸이 어때서요? 저는 만금님처럼 캐주얼한 옷이 잘 어울리는 분이 좋아요.”

“아니, 옷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아무래도 뚱뚱하다 보니…”

“아… 뚱뚱하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저는 원래 몸집이 좀 있는 여자를 좋아해요. 젓가락처럼 마른 사람은 별로 입니다. 그리고 자기관리란 몸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야기 들어보니, 만금님은 회사일도 성실하게 하시고, 보리도 건강하게 잘 키우시고…”

“게다가 나이도 많고…”

“저는 원래 연상을 좋아해요.”


아, 이 남자 왜이러나. 순간, 혹시 이 남자 제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떻게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뚱뚱한 여자가 좋다고? 마른 여자가 별로라고? 게다가 연상을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된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가능해도, 남자가 뚱뚱한 여자가 좋다고 하는 건 불가능이다. 내가 오늘 남방으로 배를 잘 가리고 나와서 아직 내 살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가? 그렇다고 내가 옷을 벗고 살집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절대로 이런 설탕발림 말에 속으면 안된다고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심장이 뛰고 난리란 말인가.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낼 모레 오십인 주제에 지금 뭘 어쩌겠다고 이러는 건지. 


“만금님! 조심하세요!”


그의 외침이 들리는 찰나,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자전거와 쾅 부딪쳤다. 팔과 더불어 무릎을 부딪쳤는지 갑자기 걸을 수가 없을 것처럼 아파왔는데, 그 순간 저쪽으로 보리가 혼자 달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팔이 부딪치는 바람에 그만 내가 끈을 놓친 것이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어떤 젊은 남자였는데, 내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줌마, 자전거 오는 거 못보셨어요? 어떻게 자전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오세요? 여긴 자전거 도로라고요. 몸이 둔해서 그런가.”  


“몸이 둔해서 그런가.”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나는 “죄송해요”라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러나 그보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보리를 향해 정신 없이 뛰어갔다. “보리야, 보리야!” 보리는 끈이 없어진 틈을 타서 맘껏 자유를 누리며 달리고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한 희균 씨는 노루와 함께 사고가 난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남자. 이것으로 희균 씨와는 영영 작별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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