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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명랑 Sep 05. 2024

방년 48세 비만소녀 탈출기 13

제13화 수영이의 고민

토요일 밤이었다. 다음 날 희균 씨와의 만남을 생각하며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뒹굴거리고 있는데, 수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뭔 일 있니?”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잔다!”

“뭐라고?”

“벌써 귀가 먹었냐? 너희 집에서 잔다고!”

“왜? 지훈이하고 싸웠어?”

“만나서 이야기할게. 지금 출발한다. 자지 말고 기다려!”

“......”

“맞다. 너희집에 술 있지?”

“술? 없는데?”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맥주 한 박스만 사와.”

“한 박스? 미쳤어? 그걸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오냐?”

“그럼 배달 시켜!”

“야, 지금이 몇 신데 배달을 해줘. 너 진짜 뭔 일 있구나?”

“여하튼 맥주 한 박스 사다놔라. 돈은 내가 가서 줄게.”


수영이 남편 지훈이는 나와 국문과 동기다. 사람들은 나랑 수영이가 단짝 친구다 보니, 내가 소개해줬거니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지훈이는 나중에 알고 보니 꽤 학내에서 유명한 친구였지만, 나는 지훈이를 학교 다닐 때 잘 몰랐다. 그건 내가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알바 하러 정신없이 교문 밖을 나서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학교 국문과가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120명 정원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교수들은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국문과라고 으쓱댔지만, 우리끼리는 ‘작가(지망생) 공장’이라고 불렀다. 작가(지망생)들을 철커덕 철커덕 찍어내는 공장.  


수영이가 지훈이와 결혼한 것은 오로지 지훈이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수영이가 나한테 그 이유를 밝혔을 때, 나는 수긍했다. 수영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애였기 때문이다. 외모를 특별히 따진다는 게 아니다. 수영이는 뭐랄까, 확실한 유물론자라서 뭐든지 애매모호한 것은 믿지 않았다. 늘 주장했던 게, “너도 괜히 성격 운운하지 말고, 남자 볼 땐 외모를 봐. 인간이 성격은 변해도 외모는 안 변한다. 성형수술하면 변할 거 같지? 그래도 기본판은 안 변해. 사람들이 왜 결혼에 다 실패하는 줄 알아? 그게 다 성격이니 취미니 그런 변하는 거에 목숨 걸기 때문이야. 성격이나 취미, 그거 결혼하면 다 변해. 실패하지 않으려면 확실한 걸 봐야 한다고. 외모거나 아니면 재산이거나.”


결정적 실수는 외모거나(or) 재산이 아니라, 외모와(and) 재산을 봤어야 했다는 데 있다. 지훈이는 배우 저리 가라고 할 만큼 잘생겼지만,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일찍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삼형제를 키우셨는데, 어머니는 결혼할 당시에도 순대국 장사를 하고 계셨다. 아들 셋은 다 그럭저럭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듣기로는 형과 동생은 각각 공무원과 교사가 되어서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훈은 뭐랄까,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어느 곳에 들어가도 상사와 다투고 나오기가 일쑤였고, 결국 가진 게 오로지 글쓰는 재주라고, 혼자서 어린이 그림책 쓰는 일을 해온 지 십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디든 날고 기는 사람들이 득시글하다. 지훈이는 그림책 분야에서도 딱히 성공하지 못했다. 꾸준히 글을 쓰지만, 그림책이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는가. 생계는 미술학원을 하는 수영이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둘한테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중학생 수영은 예쁘고 당당한 공주같은 아이였다. 아버지가 육군 장군이라 관사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운전기사가 수영이를 데려다줬던 기억이 난다. 수영이는 그림을 잘 그렸다. 중학교 때 수영이는 그림을, 나는 글을 써서, 만화책을 만든 적도 있다. 주인공 이름을 우리 각자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남자는 현수, 여자는 영정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거참 인연도 신기하지, 두 사람은 대학 졸업 후 소개팅에서 만났다. 그리고 수영이가 지훈이를 잘생겼다고 하염없이 쫓아다니고… 당연히 지훈이와의 결혼에 대해서 수영이네 집안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 수영이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여하튼 난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영이는 굽히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펑펑 울던 수영이가 기억난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다보니, 어느새 딩동딩동 벨이 울린다. 문을 열어보니 수영이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서 있다. 이게 뭔 일이래. 일단 여행가방을 안에다 집어 넣고, 수영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걸어가면, 24시간 순대국집이 있었다. 나도 걱정을 했더니만 목이 칼칼한 게 술이 땡겼다. 다음날 부은 얼굴로 희균 씨를 만날 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수영이 일이 더 급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늘 그렇듯이 순대국 두 그릇을 시켰다. 하나는 순대만. 


“나 이혼해야 할 것 같아.”

“왜? 지훈이가 속썪여?”

“속이야 썪인 게 하루이틀이니. 속썩여서 이혼했으면, 내가 결혼식 다음날 이혼했지. 너 알잖아. 외모가 안 변하는 한, 내 사랑도 안 변한다는 거.”

“그래, 잘났고. 그럼 뭔 일인데?”

“지훈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대.”


그때 순대국집 알바생이 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내장 가득한 순대국을 주고 간다. 그러더니 수영을 보고 한 마디 덧붙인다. “한 분은 순대만이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이런 심오한 순간에조차 열받게 만드는 이 세상. 대한민국이라는 개같은 사회. 순대만 들어있는 순대국을 먹는 건 수영이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나는 소장, 내장, 귀, 간, 꼬리까지 다 먹게 생기고, 공주같은 수영이는 그런 거 하나도 안 먹게 생겼냐? 열이 머리끝가지 치받쳤지만, 나무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치며 참았다. 심각한 수영이 앞에서 알바생에게 화낼 수는 없지 않나. 난 아마 죽으면 사리가 한 바구니는 나올 거다. 


갑자기 지훈이에게 짜증이 확 났다. 아니, 지가 뭐라고, 그럼 처음부터 아내 고생을 시키지 말 것이지, 이십 년 가까이 고생 시켜놓고 이제와서 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야!  그놈 미친 거 아냐? 전화 줘봐. 내가 좀 따져야겠어.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 없어서 지금까지 참고 살았대? 걔 완전 착각하는 거 아냐? 얼굴 반반하게 생겼다고 지금 유세떠는 거야, 뭐야?”

“만금아. 난 걔만 사랑해. 그리고 솔직히, 걘 유세 떨어도 돼.”

“됐다 됐어. 술이나 마시자. 내가 볼 땐, 너나 지훈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도 그동안 행복했으니까 된 거지 뭐.”

“미쳤군,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야, 미친 정도로 따지면, 너희 둘만큼 천생연분도 없는 데 말야. 지훈이 걔가 지금 잘못 생각하는 거야. 돌아도 단단히 돌았지. 어디 가서 너처럼 미친 애를 또 만나겠니?”

“나 진지해. 농담 아니야.”

“누구는 지금 농담 하는 줄 알아!!!”


갑자기 배가 고파와서 순대국을 정신없이 퍼 먹었다. 그런데, 순대국에 순대가 여섯 조각밖에 들어 있지 않은가! 분명히 보통 때는 여덟 조각이었는데, 오늘 이 집이 여러모로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좀 보세요. 보통 때는 순대가 여덟 조각인데, 오늘은 왜 여섯 조각인 거죠?” “네?!” “아니, 제가 여기 앞 아파트에 살 거든요. 아저씨가 온 지 얼마 안된 것 같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가 여기 단골이에요. 늘 와서 먹거든요. 항상 여덟 조각이었어요.” “아, 네…” 


그 청년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게 빤하다. 에효… 끝까지 싸우지도 못할 거면서, 말은 왜 꺼내니. 갑자기 기운이 쫙 빠졌다. “아저씨, 그냥 모듬 순대 한 접시 주세요.”

그날 밤, 우리가 모두 마신 술은 맥주 7병에 소주 2병이었다. 희균 씨,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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