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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명랑 Sep 05. 2024

방년 48세 비만소녀 탈출기 12

제12화 충무로에서 넘어지다 

가끔 나 자신이 괜찮아 보일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옷을 미리 골라놨는데, 한 번도 매치해보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꽤 멋졌다. 얼룩말 무늬의 블라우스에 통이 넓은 아이보리색 바지, 그리고 핑크색 자켓이었다. 내가 보통 입는 수수한 방식이 아닌 화려한 차림이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두도 매번 납작한 검은 구두만 신다가, 오늘은 기분을 낼 겸 굽이 있는 베이지색 구두를 신었다. 굽이 있다고 하지만 3센티다. 다리는 통통한 데 비해 발목이 얇아 굽이 너무 높은 것은 신지 못한다. 


하루종일 우아하게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럼 그렇지, 오늘도 끔찍한 하루가 되고 말았다. 어제 마감을 넘겼기에 마음에 한껏 여유를 부리고 출근을 했는데, 출근하자마자 막내 송희 말이 우리가 인쇄소에 사진을 잘못 보냈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맡은 어떤 회사의 사보에서 고위 경영진 중 한 사람을 인터뷰했고, 그 사람의 사진이 함께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만 다른 회사의 사보에 들어갈 사진과 뒤바뀐 것이다. 문제는 그 사진이 파일이 아니라 실물 사진이었다. 어제 인쇄소에 보낼 때 다른 사진들과 함께 퀵 서비스로 보냈는데, 보낼 때부터 잘못 보낸 것이었다. 자초지종이 어쨌든, 인쇄소에 제대로 된 사진을 빨리 갖다줘야 했다. 잘못해서 인쇄되었다가는 큰일날 수 있었다. 


송희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팀장인 내가 직접 가기로 했다. 인쇄소 직원들과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봉투에 넣어 파일에 끼워서는 바로 출발했다. 전화를 해 보니, 이제 막 인쇄를 시작하려던 참이라며 기한을 맞추려면 1시간 내로 와야 한다고 했다. 충무로로 당장 출발했다. 지하철역까지 버스 세 정거장이었지만, 마침 회사 앞에 택시가 있어 지하철역까지 타고 갔다. 서울에서는 급할수록 택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시내에 들어갈 땐 더 그렇다. 지하철을 타고 마음을 졸이며 충무로에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뛰는 수밖에 없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단거리 달리기를 잘했다. 곧잘 반에서 1등을 했다. 장거리는 잘 못하고, 다른 운동도 다 잘 못했다. 윗몸 일으키기는 열 개를 하면 최선이었고, 피구를 하면 맨날 공을 맞는 첫 번째 사람이 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순발력이 좋아서 100미터 달리기는 11초대에 끊었다. 급하면 먼저 뛰기부터 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오늘같은 날은 나의 과거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인 셈이었다. 지하철 입구에 올라서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어느새 충무로 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흘낏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덩치 큰 여자가 달리고 있으니 꽤나 볼만한 모양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웃어라. 나는 달린다. 나는 어렸을 적 좋아했던 만화 <달려라 하니>를 생각했다. 이제 머지 않아 인쇄소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사진을 우아하게 사장님에게 넘겨주고, 사보는 나의 헌신으로 인해 틀림 없는 사진을 넣어 멋지게 나올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칭송받는 영웅이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한없이 부푼 마음으로 뛰어가고 있던 찰나, “으아아”하는 소리와 함께 보도블럭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손바닥에는 작은 돌들이 박혔고, 입술에 피가 났다.  


서울에는 늘 도로 공사가 벌어진다. 듣자하니, 서울시 예산이 남으면 도로 공사를 하는 데 쓴다고 한다. 복지 사각지대라며, 사람들은 곳곳에서 전기세를 내지 못해 죽어가는데, 서울은 늘 공사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충무로 이 지역에 도로 공사 중일 줄이야. 깨진 보도블럭 사이로 오른쪽 구두의 굽이 끼어 있었다. 완전히 신발 윗쪽으로부터 분리되어버렸다. 이 놈의 싸구려 신발.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건 보도블럭의 문제이지 신발의 문제는 아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구두굽을 들고, 입술에 난 피를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나는 계속 절룩거리며 뛰었다. 아주 가관이었다. 민망했다. 어째서 뚱뚱한 여자에게는 이런 일이 늘상 발생한단 말인가. 인쇄소에 도착하자 마자 외쳤다. “사장님, 사진이요!” 입구로 나온 사장님이 입을 떡 벌리며 나를 쳐다봤다. “이 팀장, 괜찮아?” 사장님이 저쪽에 화장실이 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진을 건네주고 절룩거리며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이 핏자욱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입술에 난 피를 닦으며 달리다보니, 그만 입가 전체에 핏자욱이 묻은 게다. 오늘따라 예쁘게 차려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나섰는데 이게 뭔가. 


인쇄소를 나오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순간접착제를 샀다. 서울엔 편의점이 블럭마다 하나씩 있다. 편의점에서 웬만한 건 다 해결할 수가 있으니, 요즘엔 슈퍼마켓들이 다 문을 닫는다고 한다. 편의점 내에 있는 의자에 앉아 구두굽을 붙이고 있으려니, 옆자리에서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던 아저씨 한 분이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요 앞에 구두수선집 있는데, 거기 가서 고치는 게 좋을텐데. 그거 그렇게 붙인다고 되질 않아, 못으로 박아야지.” 어차피 이 신발은 다시는 신을 생각이 없었다. 오늘만 어떻게 신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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