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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우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by 나명랑

가와우치 아리오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이틀에 걸쳐 읽었다. 중간에 흥미가 떨어져서, 계속 읽을지 말지 망설이다가 하루를 묵혔다. 이 책은 전맹 미술관람자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하는 미술 작품 감상기다. 저자는 친구 마이티를 통해 시라토리 씨를 알게 된 이후, 그와 함께 일본 각지의 전시를 보러 간다. 때때로 다른 친구들도 동행한다. 그런데, '미술 작품 감상기'라고 정리해 버리기엔 왠지 아쉽다. 이 책은 미술 작품 감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장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일본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한 가지 주제를 향해 집중해서 달려나가는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다 보니, 전체적인 문장과 구성이 아무래도 헐겁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 곱씹게 되는 지점들은 결코 적지 않다.


시라토리 씨는 시각장애인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늘 "겐짱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꼭 감사하다고 인사하렴"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몇 배를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 뒤엉킨 실뭉치처럼 뭉글거린다. 더이상 놀림감이 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나의 할머니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작은 아버지를 학교에 그만 다니게 했다. "몇 배를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여성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어야만 남성중심적 사회 속에 편입될 수 있고, 흑인은 겸손해야만 백인중심의 사회 속에 끼어들 수 있다. 몇 배를 더 노력해야만, 비로소 그 세계에 받아들여진다.


시라토리 씨는 극도의 약시로 태어나서 색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색을 개념적으로 이해한다. 마치 우리가 전자파나 DNA 나선구조를 이해할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실물을 '볼 수 없으니'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하지만 그는 미술 작품 감상이 반드시 '보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시라토리 씨는 함께 간 사람이 해주는 '말'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데, 작품에 대한 정보나 해설보다는 보는 사람이 받은 인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듣기를 원한다. 또 그는 함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라든지, 나누는 대화의 결, 그리고 촉각으로 경험하는 느낌 모두를 작품 감상에 포함시킨다. 과연 제대로 작품이 전달되었을까? 비장애인들은 궁금해하지만, 어릴 적부터 시각적 정보로 이미지를 구성할 수 없었던 그에게 작품은 뇌 안에서도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감각이 특별히 더 발달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비장애인의 환상과 달리,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더 보이는 건 아니다. 시라토리 씨의 말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느끼는 것과 보이니까 느끼는 것은 서로 동등하다.


시각 능력을 가지고 있는 비장애인들은 과연 작품을 '봄'으로써 감상하는 것일까? 본다고 하더라도, 보아지는 것은 항상 똑같지 않고, 또 못 보는 것이 어딘가 존재한다. 나의 기억과 경험에 따라, 늘 더 보이거나 덜 보이는 것이 있다. <어린왕자>에 나왔던 모자 그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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