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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 PostModern Oct 11. 2022

글을 쓴다는 것

브런치 작가 지원글 1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후부터 끊임없이 글을 썼다. 아니, 끊임없이 쓰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글을 쓰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민과 전환점을 이제야 발견했다. 정확한 주기와 기간은 알지 못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곧 ‘나의 글을 돌아보는 계기’가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 같다.

 ‘말장난’. 나의 글은 말장난이었다. 말장난으로 가득한 글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그 의도를 적나라하게 설명하면 된다. 그렇게 나의 말장난, 나의 생각, 나 자신이 처절하게, 아니 기쁘게 무너졌다.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글을 되돌아보며 하나의 전제를 세우려고 한다. 좋은 글, 또는 나쁜 글로 나누지 말자. 옳은 글, 또는 틀린 글로 나누지 말자. 무엇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문제는 나의 글을 돌아보는 것에 논점이 될 수 없다. 더 나은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족하다. 굳이, 지금 이 방향이 ‘좋다’, ‘옳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나는 좋지 않은 글을 썼다’ 거나 ‘틀린 글을 썼을 뿐’이라는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의 글을 분명하게, 정확하게, 철저하게 되돌아보고 정리해도 늦지 않다.


 독자가 필자뿐인 글’. 언제부터였을까.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된 때가. 아마도 책을 붙쫓은 때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했지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 영향, 특히 부정적인 영향은 ‘즉시’ 나타난다. 이 부분은 글을 쓴 사람도 자기 글을 보면 느낄 수 있다. 무의식적 사고의 바탕에 ‘책’이 들어섬을 마주한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모습은 ‘잘난 척’이다. 자기도 멋져 보이는 글, 자기가 읽은 책과 같은 수준의 글을 쓰고 싶어서 몸부림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하게 보이지만, 정확하게 그리고 깊게 아는 사람이 보면 쉽게 발견한다. 이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모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 나의 글은 모방의 수준이 아니었다. 진정한 모방이었다면 독자가 필자뿐인 글로 전락하지 않는다. 모방이 아닌 고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글을 읽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독자와의 관계를 추구하지 않고, 나의 독설을 독자에게 쏟아부은 행위였다는 말이다. 이것의 결과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독자가 필자뿐인 글을 쓰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필자가 쓴 글을 다시 봤을 때 필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글, 곧 독자가 존재할 수 없는 글로 바뀐다. 나의 글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도 모른다.

 

 ‘무르익지 못한 글’. 무르익지 못했다는 말은 지혜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깨달은 것을 전해주며, 독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때로는 나의 깨달음이 타인에게 ‘애매모호함’으로 느껴지는 글이라는 의미다. 이 부분은 부정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아쉬울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아니,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며 무르익은 글로 나아가게 하는 부분이다. 생각은 하지만, 무르익은 글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에 매우 큰 문제가 있다. 표현을 바꾸고, 쉽께, 가장 쉽게, 그러나 깊게 수정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부족한다. 애초에 깨달음은 ‘내게 일어난 일’이기에, 독자가 ‘똑같이’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깨달은 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 뿐이다. 그래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꼭 쓰고 싶은 부분이 ‘깨달음’이며 그것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깨달음은 깨달은 것을 어떻게 쉽게, 그러나 넓고 깊게 전달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 노력에 관한 것 아닐까 싶다.


 절망으로 점철된 글’. 가끔이 아닌, 매우 자주 절망으로 점철된 글을 쓰는 모습을 발견했다. 짧게 쓴 글을 보면 전부, 이상하게도 절망적이다. 글의 결말이 늘 절망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와 나 자신의 나약함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 나의 상태를 정확하다면 매우 정확하게 직시하지만, 그 직시는 절망일 뿐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어렵기 때문에 또 쓰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하기 싫은 것을 끊임없이 하게 한다. 나는 글의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측면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문자, 쓰인 글 자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흐름과 그 흐름 속에 있는 문장이다. 흐름은 구조이며, 문장은 맞춤법이다. 외적인 측면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글의 내적인 측면에 문제가 있으며 그 글은 죽은 글이다. 내적인 측면은 ‘글을 쓰는 자기 자신’이다. 글은 필자 속에서 나온다. 필자 속에서 나온 글자가 또다시 필자를 이룬다. 부정적인 단어가 쓰였다면 필자의 상태가 그런 것이며, 동시에 그 글자가 필자를 삼킨다.

 이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계속된 관계다. 글쓰기에서의 관계는 수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읽은 글쓰기에 관련된 책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글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라, 누군가의 지적을 받아들여라, 규칙적으로 써라. 내적인 측면이 더 나은 방향, 곧 관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뜯어고침’이 필요하다.

나의 글을 되돌아보며 뜯어고침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깊음과 넓음으로 무르익은 글, 곧 기쁨과 소망의 글을 쓰고자 한다. 고집과 절망을 뜯어내며 오늘도 한 글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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