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nti PostModern
Oct 11. 2022
오늘도 수많은 것을 마주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이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인 세계관에 관한 것으로 외적 요인이 중요한가, 또는 내적 요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였다. 현세대의 문제, 아니 모든 시대의 문제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개인의 책임, 하나는 사회의 책임이다. 개인은 사회의 책임을 묻고,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묻는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사람이 환경을 조정하는 것일까 하는 신기한 현상과 마주했다. 이것이 개인의 영역에 들어서면, 내면이 행동을 다스리는가 또는 행동이 내면을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그중, 특별히 ‘언어’에 관한 신기함이 내게 찾아왔다. 속에 있는 것이 언어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언어를 사용함으로 사용자가 언어화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러한 신기한 현상은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보다 폭넓은 물음으로 이어진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에 무의식이 주장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분명한 의식이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경쟁(競爭)’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던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의식이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자 한다.
대학교를 살펴보며 가장 많이 접한 단어는 ‘경쟁률’이었다. 입학 경쟁률, 수시 경쟁률, 정시 경쟁률 등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과정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경쟁을 미화’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경쟁(競爭)’의 뜻은 ‘서로 앞서가거나 이기려고 다툼’이다. 한자를 풀면 그 뜻이 매우 무섭다. ‘경(競)’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치열하게 말다툼하는 데서 다투다의 뜻’이다. ‘쟁(爭)’은 ‘손과 손에 갈고리를 들고 싸운다는 데서 다투다의 뜻’이다. 경쟁이라는 단어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다투다’의 한자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입학 경쟁률은 입학하기 위해 다투는 비율을 나타낸 것일까. 시비를 가리며, 이기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말일까. 더 나아가서 입학하기 위해 손과 손에 무기를 잡고 싸우는 비율을 뜻할까.
‘다투다 : 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다’
‘시시비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일’. 사람은 대화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듣는다. 그 가운데서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어떤 이는 인간에게 옳고 그름을 따질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질 수 없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매우 분명하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하다.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일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전달되면 안 된다. 사람은 ‘관계’한다. 인간의 존재 자체의 옳고 그름으로 가면 안 된다. 곧, 관계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그 어떤 시비도 가릴 수 없다. 타인의 존재를 자기 인식에 가두어 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존재를 존재로 보지 않고 ‘일’ 또는 ‘수단’으로 여긴다.
‘싸우다. 말이나 힘으로, 이기려고 다투다’. 많은 사람과 마주하며, 이기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기지 못해서 분을 참지 못할 때가 많다. 재주나 힘을 겨루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정말 비참하다. 이러한 모습은 폭력으로 이어지며,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갈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는 우위를 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시시비비도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유가 본인의 생존에 있는지 모르겠다.
언어가 인간을 지배하는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가. 이 물음은 항상 공존한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동시에 그 언어에 지배당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의 뜻과 그 유래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동야 문화권에서 한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시비비’와 ‘싸우다’는 ‘다툼’의 의미를 지닌 경쟁의 한자를 풀어낸 또 다른 표현이다. 경쟁하는 시대, 시비를 가리고 싸움을 조장하는 곧 다툼을 권장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어떤 이는 이러한 나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선의의 경쟁도 있지 않은가’
입학 경쟁률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쟁을 ‘선의의 경쟁’으로 볼 수 있는가. 경쟁 자체를 선의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없다. 선의는 선의이고, 경쟁은 경쟁이다. 다투는 행위를 선의라고 볼 수 없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표현은 역설이 아닌 궤변이다. 이 시대는 경쟁을 추구한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나의 의식에 ‘다툼’을 심었다. 의식이 무의식에 의해 무너졌다. 경쟁하는 시대 앞에,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의의 경쟁이 아닌, 선의를 경쟁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