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각자의 몫이다.

-달개비와 닭의장풀

by 최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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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이 어여뻐

가던 발걸음 멈추고 담아본다.

더 선명하게 담아지길 바라지만 내 솜씨도, 폰의 화질도, 빛도

한계를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어때?

담고 싶은 것 담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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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옥수수 꽃이 쓰러진 채로 피어있다.

내 기억 속에선 이곳에 검은 풍뎅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함초롱 이슬을 살짝 머금은 채 중심을 잃고 쓰러진 옥수숫대.

추억인 듯 그냥 담는다.

쓰러진 옥수숫대를 담으면서도 머릿속에선

풍뎅이들이 옹기종기 매달려 무거워진 풍경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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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다시 또 멈칫~~~

남들이 '저 사람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궁금함을 자아내는 어정쩡한 포즈로 쪼그리고 앉아 담아본다.

지나가는 낯선 분들이 멈칫하며 무언가를 담는 나를 바라본다.

특별할 것 없는 길가에서 저 여인이 왜 쪼그리고 앉았을까

호기심에 바라보다 그 대상을 보곤 시시하다는 듯 발걸음을 옮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에겐 그냥 풀꽃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니 때론 잡초일 뿐인 그들~!!!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이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다.

제대로 된 카메라로 담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소소한 것들을 담을 때 내 주변을 지나치는 분들이 주는 흔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어쩜 나는 때론 그 반응을 즐기기도 한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통해

소소한 것에 대한 사색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나태주의 [풀꽃]처럼 향기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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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 두물머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함께 걷다가 멈칫 걸음을 멈추고

길옆에서 만난 닭의장풀을 담고 있었다.

마침 함께 길을 걷던 엄마가,

"어마~~ 뭐하러 그걸 찍는대?"

하시는 거다.

"이뻐서. 작고 앙증맞은 것이 예쁘잖아요."

했더니

"흐미... 달개비가 이뻐서 담는다고? 난 징글징글하구먼."

하시는 거다.

"왜요?"

"밭에 징그럽게 나는 것이 그 달개비 아니냐.

뽑아놓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올라오는 것이

어찌 그리도 독한지.... 나는 걔가 싫어야. 독한 달개비..."


ㅋ~~ 재밌다. 구성지다. 맛나다...

엄마의 그 말이 왜 그리도 구성지게 느껴지는지.

"엄마, 예전에 엄마한테서 달개비라고 배웠는데

제대로 된 이름은 닭의장풀이라고 하더라구요.

참 이상하지요.

달개비라고 하니까 밭에 진저리 치도록 난 잡초가 그려지는데

닭의장풀 하니 귀엽고 앙증맞은 꽃이 먼저 그려지니요..."

"달개비여, 그냥 달개비. 징그럽게 뿌리를 뻗는..."

엄마의 목소리와 엄마가 부르는 이름에는 엄마가 가지고 있는

그들의 이미지가 이미 충분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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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같은 꽃이지만 부르는 이름과

그들을 부르는 사람들의 추억에 따라 이미지가 전혀 달라짐을

느끼는 순간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경이를 느끼는 것은 왜일까?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는 것들이 또한 그러하지 않음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작은 발견의 묘미를 안겨준 순간이어서일까.


달개비가 닭의장풀이 된 것은 순전한 교육의 효과이다.

계란꽃이 개망초가 된 것 또한 그러하다.

자가용 꽃이 자운영이 된 것 또한 그러하다.

내가 어려서 알았던 꽃 이름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꽃들을

사전에 나오는 꽃 이름으로 불러줘야 찾을 수 있음을 안 이후로는

책에 나온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책에 나온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추억은 온전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쉬움이란...

그래서 나는 가끔 엄마가 알려준 그들의 이름을 되뇌곤 한다.

추억을 날리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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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여쁘게 담았던 닭의장풀을 바라본다.

그냥 그들은 예전에 알고 있던 밭에서 뽑아내야 할 잡초였던

달개비가 아니다.

흔하지 않은 꽃색을 지닌 앙증맞고 예쁜 작은 풀꽃일 뿐이다.

그러나 밭에 뿌리를 맘껏 뻗은 그들을 달개비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제거해야 할 또 다른 잡초로 둔갑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현상이 아니던가.

불리는 이름이 소중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님을 느끼는 순간이다.

장애자, 장애우가 아닌 장애인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그러하겠지.

부르는 이의 심상이 또한 그렇게 녹아져 있어서 그렇겠지.


입담 좋은 울 엄마의 입에서 나온 달개비는 말 그대로 달개비였다.

밭에 호기 좋게 영역을 넓혀나가 엄마의 한숨을 자아내게 하는

잡초에 지나지 않은 달개비.

그러나 이젠 도심의 생활에 익숙한 내겐 닭의장풀로,

아름다운 풀꽃으로 업그레이드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말농장을 하면서도 나는 그 아이러니를 경험하곤 했었다.

이슬 머금은 그들이 어여뻐 폰에 담으면서도

그 이후엔 '미안, 너희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하면서 그들을 뽑아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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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겐 기가 막히게

좋은 추억으로, 누군가에겐 징글징글한 추억으로 남으니까.

엄마 입에서 '달개비'란 이름이 흘러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려진

밭의 침입자, 잡초로 그러지는 그 순간이 내겐 '유레카'였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다가 엄마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무릎을 치며 '아~~'를 외치는 순간.

우리에겐 이런 순간이 참으로 많음을.

그러나 쉽게 잊고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누구나에게 한 대상이 늘 똑같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때로는 그렇지 않음도 본다.

그 역시도 각자 경험한 추억이 가지고 있는 영향 이리라.

달개비와 닭의장풀처럼

일상에서 부딪히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누구의 이미지가 옳고 그르냐가 아닌 경험의 차이이다.

때론 확률, 통계처럼 그러해야 함을 전제하지 않음을 우린 잊고 산다.

달개비와 닭의장풀처럼 서로의 대화에서, 소통에서

그 추억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몫을 생각함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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