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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아들과 엄마의 세상만나기
세상을 바꾸는 힘 -절박함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by
최명진
Sep 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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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장애를 피멍진 가슴으로 끌어안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이젠 끌어안았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절망처럼 다가오는
끝 간데 없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절망의 시간을 지나 벌써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이제 아들은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등교를 할 정도로 나름 발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이를 먹을수록 또래와의 간극은 커지고 있음이니
아들의 미래를 그리기엔 또 다른 막막함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어쩌다 보니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발표 한 번 제대로 못하던 내가
장애인권을 강의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아들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아들의 장애를 통해 답답한 현실을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복지관과 시청, 교육청을
찾아다니다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가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보단 힘을 합하니 더 문제를 푸는데 수월함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
그들도 나처럼 장애를 가진 아이 때문에 절망의 늪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뭉치게 했던 것 같다.
아들의 장애를 수용하기에 내겐 어떤 정보력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큰아들이 하는 아이템플에서 '우리 아이가 혹 자폐아?'란 글귀를 읽고
세상이 무너진 듯 유체이탈을 했던 그날...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생각했지만 그런 나를 잡아 일으킨 사람도 또한
장애가 있는 나의 아들이었다.
엄마가 뭔가 다른 것에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백만 스물둘의 에너자이저 아들은
내가 시체처럼 누워있는 것조차도 사치라고 느끼도록 나를 잡아당겼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비록 정신은 이미 방전된 배터리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본능처럼 순간이동을 하는 아들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샴쌍둥이 같은 내 인생.
그렇게 나는 아들과 살기 위해 세상에 두려운 발을 내디뎠다.
아는 언니로부터 소개받은 신경과에서 복지관, 대학병원까지...
병원 투어를 하면서 나의 절망은 더 든든한 콘크리트가 쳐졌고 그 와중에도
숨은 쉬어졌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장애를 인식하기 전과 후의 아들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장애를 수용해야 하는 나는 늘 살던 일상을 지옥으로 일관하며 미쳐가고
있었다.
혼자서 영어를 읽던 아이는 더 이상 천재가 아닌 자폐성 장애의 전형적 특징을 보였을
뿐이라고...
이 상황을 어찌 멀쩡한 정신에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가끔 이성을 잃은 듯 흐느적거리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치유의 과정이다.
차마 이성을 가지고는 견뎌낼 수 없기에 때론 흩어진 감성으로 자정작용을 하는
것이리라.
다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자신뿐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
그 가족에게 너무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 빨리 털고 일어서야 함이다.
어찌어찌 최고의 명약인 시간은 내 생명을 연장시켰고 마취되었던 이성을
다시 불러들였다....
복지관에서 만난 또 다른 장애인 부모들은 내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또한 많은 경험적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절망을 했다. 장애를 이유로 학교조차도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암울한 현실. 그렇게 나는 부모들의 모임에 나갔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었다. 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울 아들은 누구나
때가 되면 가는 학교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
그 절박함에 다급한 내 마음이 엉겨 붙어 아들에게 발전의 채찍을 가혹하게
휘두르기도 했다. 그런다고 된다면 장애일까만...
모임과 스터디를 통해 귀를 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아들의 장애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어 갔다.
4년 여 동안 장애인 부모들은 돌보기도 어려운 아이들과 함께 서울을 오르내리며
'장애인에게 교육은 생명이다'를
외치며 법 제정을 외쳤고, 지역마다 교육청에 천막을
치고 지역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에 대해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7년에 지금의 장애인들의 교육에 큰 근간이 된 '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제정이 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드디어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좋아했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게 책장을 넘기듯 쉽단
말인가? 법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우린 다시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쳐야 했다.
법은 멀고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장애인의 교육권이 이동권으로, 활동보조로, 그 영역을 넓혀 가면서 지역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매진해야 했다.
난 여전히 두려움이 많고 나약했다. 그렇지만 힘을 보태고 싶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힘이지만 열심히 보탰다.
그 와중에도 학교로, 치료실로, 도서관으로, 지역사회로 아들과 지속적으로 다녔다.
더디지만 아들은 단어, 간단한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교육법이 제정되면 다 될 줄 알았던 아들 앞으로 가장 처절한 20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 큰 난관을 어찌 헤쳐나가야 할까?
벌써 십 여 년이 흘렀다. 철옹성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도 울 아들의
발전만큼 더디게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에 대해
의견을 더 개진하게 되었고, 좀 더 적극적인 교육의 주체로 함께하고 있다.
물론 학교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지만 반드시 변하리라 믿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바위의 변화를 가져왔으니까.
이제는 교육권 밖의 그들의 삶을 절실히 고민할 때다.
학교 이후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계를 할 때이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이다.
오늘 일반학교의 일반교사들을 대상으로 장애인권교육을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지구가 돌고 있는 것처럼....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변화의 기초가 됨을 느낀다.
장애인들은 시외버스,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갈 수 없는 현실을 얘기할 때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았다. 대놓고 놀라지는 않았지만 얼굴 근육이 굳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고 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땅의 장애인들은
다른 이들에겐 너무 당연한 환경을, 척박한 사막을 걷는 것처럼 혹독한 몸짓을 통해
당연한 권리를 찾아 세상을 향한 외침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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