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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리 Nov 27. 2021

울리히 벡 '위험사회'를 다시 읽는다.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는 울리히 벡이 35년 전 ‘위험사회’에서 언급한 제2의 현대성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벡은 체르노빌 사건으로 과학 기술 위협과 생태 오염의 심각성을 경험한 뒤 ‘위험사회’를 저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분석은 상당 부분 ‘예언적’이었으며,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2021년 지금.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계기로 벡이 경고한 위험사회의 특징과 문제들을 상당 부분 직접 겪고 있다. 영민한 사회학자의 능력과 사회학적 통찰력의 정수를 만끽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아프고 어렵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현대성 또는 근대성(modernity)이 전근대 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온 사회의 특성이라고 본다. ‘근대-탈근대 논쟁’에서 벡은 현대성이 산업사회와 완전히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현대 사회의 특성, 즉 현대성은 산업사회의 특성이 증폭된 결과물이며, 한마디로 ‘위험’으로 정리될 수 있다.

  즉,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한다. 현대 사회의 특성, 즉 현대성은 위험과 위난(危難), 위해(危害)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위험은 새로운 시대에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오롯한 결과물이다. 벡은 산업사회, 집단적 정체성, 민족국가, 노동사회, 복지국가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제1의 근대성이 예측불가적 위험과 위해에 직면하며 새로운 근대성, 즉 ‘제2의 현대성(근대성)’을 낳고 있다고 보았다. 제2의 현대성은 산업사회의 근대성이 낳은 다양한 위험을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현대성을 형성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면에서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변증법적이며 재귀적(再歸的)이다.

 

  그가 ‘위험’을 현대성의 핵심 특성으로 꼽는 이유는 전근대 사회에 비해 위험의 성격과 영향력이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성 위험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근대성이 근대성을 위협하고 무용하게 만드는 역설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위험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따른 빈곤의 위험이 주를 이뤘으며, 개인적이며, 과학과 지식으로 충분히 인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위생과 기술의 낙후로 인해 파생되는 것이었다. 지금의 위험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위험은 더 이상 국지적이지 않으며, 과학과 법에 의해 확립되어 온 위험의 평가 방법이 와해되고 만다. 기술의 종류와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그 결과의 계산 불가능성도 커진다. 과거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통제와 해결이 불가능해지는 것도 중요한 변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험이 과학-기술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험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벗어나 발생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때문에 위험을 둘러싸고 과학-비과학계는 물론 과학계 내부에서조차 논쟁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현상은 모두를 불안으로 이끈다.  

  물론 벡은 산업사회의 계급 지위가 위험지위와 무관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산업사회의 계급에 따라 위험의 피해 정도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은 특정 집단에게 특히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위험은 민주적이다. 벡의 논의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문장은 근대화 위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가 상대적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위험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고 일시적으로 위험과 위난, 위해를 이용해 성장한 시장을 통해 이윤을 취하는 집단이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위험의 부메랑 효과’를 피할 수 없다. 위험 생산자와 수혜자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또한 위험은 산업사회의 근간인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화를 야기한다. 즉 재산 가치의 저하와 생태적 공공수용(expropriation)을 진행시킨다. 자본주의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공산화가 위험사회를 계기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본다. 대규모 평등주의 기초 위에서 스모그는 생산 책임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험은 산업사회의 계급과 국가 간 차이가 무력화시킨다. 역설적으로 결국 현대사회의 위험 앞에서 모두는 하나여야 하고 하나일 수밖에 없다. 위험은 산업사회 정치가 그토록 지향해 온 세계시민으로서의 통합이 이뤄지는 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위험사회는 새로운 이해관계를 만들어 내고, 위험에 내몰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이들이 생산한 공동체의 정치적 수행능력은 미지수이나 벡은 동일한 위험지위에 놓인 사람들이 단결하고 연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 위험사회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침식하고 위난 공동체로, 더 나아가 세계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계급 지위가 중요한 사회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나 위험사회에서는 의식(지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따라서 위험사회에서는 위험 인지와 평가, 대응에 필요한 지식이 새로운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이 말은 기존의 지식과 과학, 전문가의 위상에 변화가 생김을 의미하며 과학-기술적 합리성이 사회적 합리성과 경합하거나 소통해야 함을 의미한다. 벡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위험사회에서 사회학은 위험에 관한 지식의 기원과 확산이 정치적 잠재력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벡은 위험을 중심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하면서 기존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수행한다. 특히 코로나19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 벡이 강조하는 근대화 위험의 과학기술과 지식 의존성의 문제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부와 위험은 모두 분배의 대상이며 각각 계급 지위와 위험지위를 형성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험과 위해는 즉각적이지 않으며 인지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 유무와 영향력을 확인받기 위해 전문가의 판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전문가들 역시 파편화된 근대적 지식체계와 방법론에 의존해 제한된 결과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은 실험실에서 ‘재현’된 자연에 불과하며 그들이 고려한 변수는 현실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실수를 반복하며 누적된 모순된 담론들이 발달된 미디어를 통해 축적되고 재생될수록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은 커지게 된다. 결국 위험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영역의 문제가 된다. 이는 결국 개인화로 이어진다. 백신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물론 과학계의 모순적 담론들이 공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벡은 개인화가 양면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쉽게 설명하면 각자도생의 사회, 불신의 사회의 도래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벡은 이러한 개인화가 곧 사회의 파편화를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제2의 현대성, 즉 기존의 근대성과 다른 근대성은 위험사회를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된다. 과학 현상에 대한 셀 수 없는 개별화된 해석이 존재하고 개인화가 진행되지만, 그들은 위험의 보편성은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위험사회’ 2부 주제인 ‘개인화’는 이렇게 등장한다. 벡의 성찰적 근대화(현대화) 논의는 위험사회 테제와 개인화 테제로 구성되며 구조와 행위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벡의 개인화는 전통적 지배로부터 해방과 공동체로부터의 유리를 의미하는 ‘해방의 차원’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존 안전 기제의 상실에서 동반되는 ‘각성’, 이후 새로운 사회통합으로의 ‘재점목’으로 구성된다(이광근, 2015). 구체적으로 2차 현대성에서의 개인화는 핵심부 국가에서 탈산업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보통신 기술 발달 등으로 인해 개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통합력이 감소하고, 개인의 준거집단이자 안전장치로서의 집단의 의미가 희석됨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직접성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Beck, 1992). 유사한 논의를 진행했던 기든스와의 차이는 기든스는 개인화의 맥락을 신자유주의 복지제도와 관련해 활용했으며, 개인의 책임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 벡은 위험사회에서 발생하는 개인화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통합의 계기로 나아간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벡이 탈근대화가 아니라 성찰적 근대화를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종언이 아닌 근대성 내부의 연속-불연속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개인화 역시 현대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이라는 경험이 사람들을 ‘계급’이라는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할 것으로 보았으나 계급 형성을 억제하거나 해체하는 개인화 과정의 존재를 간과했다. 베버는 종교, 신분 등의 전근대적 요소가 개인화를 막으며, 전통적 신분 정체성과 자본주의 계급 위치가 결합하여 새로운 생활 경험을 하는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보았으나, 벡은 이 역시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분석이라고 비판했다.

  표준화된 규율 상실, 노동시장의 안정성 해체 등에 따라 노동자들은 더 이상 유사한 경제적 지위를 갖는 사람들과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삶도 표준적 계급 유형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실행하고 ‘책임’ 져야 하는 것으로 개별화된다. 계급 지위, 계급 정체성, 계급투쟁은 산업사회의 1차 근대성에서는 유효했지만, 2의 근대성(현대성)에서는 의미를 상실했다고 벡은 보았다.

  근거로 벡은 복지제도의 발전을 꼽는다. 복지제도를 통해 더 이상 계급 지위 및 정체성이 힘을 잃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경제적 풍요와 복지에 따른 분배 정책으로 개인은 계급이 아닌 소비자로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각종 분쟁과 갈등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제도화된 법과 정책이 해결해 준다. 더불어 복지 수혜자가 더 이상 가부장 중심의 핵가족이 아니라 개인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장의 근거가 된다. 즉, 계급투쟁의 결과물인 복지국가가 개인화를 제도화하고 계급 문화는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벡의 시각은 계급, 신분, 젠더, 인종, 종교, 섹슈얼리티 등 일정 기준에 따라 단일한 것으로 분류되는 범주들 내에 존재하는 이질성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이뤄지고 이들이 공통의 위험 앞에서 서로 연대하거나 소통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21세기 현대 사회를 개인화가 진행된 시대로 볼 것인가의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벡은 계급 이론에 대한 오해와 더 나아가 위험에 대한 과장이라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벡의 위험사회 논의와 개인화 개념은 기존의 근대성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현대 사회의 특성과 문제점들, 그리고 인식의 문제 즉, 과거의 근대성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봄에 있어, 더 나아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 놓고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한 개념이자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각자도생’ 하나 결국 소통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때의 정체성은 개별적이고 다원적인 그런 사회 말이다. 또한 신자유주의화 된 노동사회에서 기존 노동운동이나 노조가 담아내지 못했던 고용방식에 따란 이질적 삶과 이해관계,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설명하고 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출구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 변동 속에서 진행된 정치적 계급투쟁의 실패가 계급정치의 주변화를 야기한 오늘날, 벡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것인가.


  벡의 개인화 논의는 3부 하위 정치(subpolitics) 논의와 연결된다. 벡은 위험사회의 도래는 제도 정치의 쇠퇴를 낳으며 하위 정치 등장과 활성화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하위 정치는 시민주체적이며 탈제도적, 탈계급적, 분산적이다. 환경오염에 대응하기 위해 학계, 시민단체, 학생, 주부들이 연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항의집회에 다양한 시민들이 모임을 꾸려 참여한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 개인이 정당을 대신하고 개인이 의제를 선택하고 참여를 결정한다. 발달한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이질적 집단이 비슷한 관심사를 바탕으로(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벡의 하위 정치가 실제로 실천되는 구체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벡은 하위 정치의 영향력에 대해 ‘위험사회’에서는 미지수라고 표현했지만 나중에 인터뷰 찾아보니 기대감을 표했다.)

  벡의 위험사회 논의는 변증법적 구조를 띤다. 위험은 무조건적으로 축소시키고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수용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개인화는 위험사회에서 파생된 불가피한 변화이며 사회를 파편화시키지만, 이는 새로운 형태로 사회를 재통합시킨다. 하위 정치는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키지만 제도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문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다.


  코로나19, 미세먼지, 해양오염 등 우리의 삶은 위협을 받고 있다. 벡의 지적과 달리 바이러스는 다시금 복지국가를 소환했고 국가는 문을 걸어 잠갔다. 과학자와 의료인에 대한 대중의 의존도는 증가하고 있으며, 하위 정치는 위축되고 있다. 모이는 것 자체가 공포인 상황에서 우리는 연대를 멈추고 정체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세계시민으로서의 연대와 소통의 기회가 커졌으며 과학-기술 합리성에 대한 의존이 증가함에 비례해 이에 대한 회의와 공포, 불신도 함께 자라고 있다. 많은 백신효과와 치료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과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변칙 사례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과학-의료계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방역 완화를 선택한 것은 결국 경제논리와 사회적 활동에 대한 강한 요구 때문이었다. 확진자 수가 100명대 일 때의 방역 수준이 3000명일 때보다 엄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신 접종 비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과학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 학교에서 2/3만 등교하는 지침에 따라 전체 등교 인원은 줄였지만, 30명의 학생들은 한 교실에서 모여 수업을 듣는다. 무엇이 위험이고 아닌지를 가름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 합의(과학, 정치, 경제 등의 이해관계가 반영된)의 결과물이자 ‘인식’의 문제임을 우리는 보았다.

 이러한 모순적 현상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더 나은 근대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요구하고 연대하고 인정하고 성찰하는 것. 과학의 사회화와 사회의 과학화가 교호 해야 하며, 시민들이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불신과 불안을 냉소와 포기로 남겨두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위험사회를 다시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지금의 혼란과 불안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다. 






*이 글의 불법적 사용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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