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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꾸준히 못하는 인간

by 삽질

제가 지금도 교사를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사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은 선생님들과의 교류, 담임으로서의 학생지도 부담, 강제적 업무분장에 따른 책임 따위가 있었습니다. 제가 유별나게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초등학교 특성상 주변에 여자 선생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담임을 맡고 원하지 않는 업무를 매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족쇄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많지만 선택의 폭은 무척 제한적입니다.


기간제 교사는 깍두기 같은 존재입니다.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만 투명 인간처럼 생활할 수 있는 신분이죠. 선생님들과 많은 교류도 없고 업무로부터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에 구멍을 내지 않고 주변 선생님들과 모나지 않게 지내면 무사히 계약기간을 마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담을 맡고 있으니 학생 생활지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과목과 업무를 제가 선택해서 기간제 채용에 지원하면 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권리를 갖고 있지만 의무가 없는 상당히 좋은 옵션을 갖게 됩니다. 직업 불안정성이라는 리스크만 감당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직업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좋은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저도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잘만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포기하고 도전하길 반복하면 사는지 모를 일입니다. 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제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기 때문이겠죠.


저는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 이뤄낸 걸 부수고 새로 시작하는 쾌감에 중독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박 중독자들은 돈을 따는 것 자체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돈을 딸 것 같은 그 '기대감'에 중독되는 것이죠. 돈을 따더라도 계속해서 도박을 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비슷한 증상이 있습니다. 뭔가를 노력해서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그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곤 합니다. 그동안 해왔던 노력, 비용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해보는 데 큰 주저함이 없는 편입니다. 아내는 끊임없이 행동과 생각이 변화(진화) 하는 저를 보면서 마누라 안 바꾼 게 용하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칭찬이겠지요?)


이전에 '제게 교사는 안정적인 직업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쓴 적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댓글에 '한 가지 일을 5년 이상 해본 적이 있냐'는 날이 선 댓글을 달아 놓으셨더군요. 제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꾸준하게 무언가를 해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교사 일을 거의 10년 가까이하고 있지만 중간에 그만 두기도 했고 뉴질랜드에선 어린이집 교사, 다시 한국에선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꾸준함이라고 표현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이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보라고요. 그리고 그런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저를 증명해 보라고요.


저는 선택을 할 때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도 중요했지만 기존의 것에 대한 회피가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하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선택들을 해왔던 것이죠. 아내의 말처럼 저를 증명하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자세는 분명 중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살면서 비겁한 선택을 하고 포기한 경우도 많지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 적도 많았습니다. 회사에 다니기 싫어 교대로 갈아탔고, 교사 일과 한국이 싫어 뉴질랜드로 도망갔습니다. 임용에 떨어졌지만 다시 보기 싫어서 제 삶에 필요한 공부들을 해냈습니다. 포기로 가득한 우여곡절 한 삶 끝에 저는 의무는 없지만 권리는 있는 괜찮은 옵션들을 여럿 가질 수 있게 됐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제가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인생이란 게 나를 위해 사는 건데 굳이 남에게 증명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해내는 역량이 그렇게 중요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많은 걸 포기해도 내 '인생'만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길은 정해져있지 않으니까요.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놓치지 말아야 하고요. 저는 제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제 삶의 '주도권'과 '자율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끊임없이 해왔던 것입니다. 분명 운이 무척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저는 아직 살아남았습니다. 몇 가지 좋은 옵션들도 챙겼고요. 앞으로도 제 삶은 그렇게 흘러갈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겨 '편안함', '안정감' 같은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요. 편안함은 무척 매력적이고 달콤합니다. 하지만 이 편안함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달콤함이 덫이 되는 것이죠. 제가 기간제 교사로 계속 일하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자율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뤘을 때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내년에는 도망보다는 새로운 호기심에 더 큰 무게를 둔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어떤 느낌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똥인지 된장인지 이번에도 찍어 먹어봐야 알겠지요. 그래도 새로운 경험은 제 삶에 또 다른 옵션을 가져다줄 테니 걱정하진 않습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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