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연락하는 친구가 많이 없습니다.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다 보니 그나마 연락하던 친구들과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있죠. 제가 엄청 인싸이거나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 무리에선 나름의 구심점 역할을 할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함께 하자는 말과 함께 의리로 똘똘 뭉치기도 했었죠.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관계들이 정리되더군요. 삶의 형태가 바뀌고 친구들의 가치관, 생각들이 달라지는 만큼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엇갈리는 듯해요. 그럼에도 가끔씩 만나 근황을 공유하고 과거의 추억에 젖다 보면 다시 어릴 적 친구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 여유가 생기면 지금 보단 더 자주 볼 수도 있겠지만 앞날은 알 수 없지요.
다행히도 저는 지금 살면서 사귀었던 어떤 친구보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아내입니다. 아내와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 만났습니다. 총 4년을 함께 근무했죠. 처음 2년 동안은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땐 이 사람이 제 아내가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3년 차에 동학년이 되면서 친해지는 계기가 됐죠. 마침 다른 동학년 선생님들도 또래여서 굉장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술도 진탕 마시고 인생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꺾여가는 청춘을 보냈었죠. 그렇게 이런저런 서로의 속 마음을 이야기하다 보니 아내가 저와 굉장히 비슷한 가치관과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호감을 갖게 됐습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젊었을 때 만났다면 과연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지를 말입니다. 아마도 우린 서로를 싫어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곤 해요. 나이 들면서 경험이 쌓이고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바뀌어 가잖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에 빠졌을 때 마침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죠. 그리고 만약에 인생에서 하나의 선택만 달리했어도 우리는 서로를 만나지도 못했을 수도 있었고요. 아내는 타 지역에서 근무하다 임용을 다시 쳐 경기도로 올라왔고, 저는 원래 공과대학을 다니다 교대에 장수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만약에 한 해라도 늦게 발령을 받거나 입학을 했어도 우린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평생을 살았을 겁니다. 저희가 만나고 부부가 된 사건이 매우(x1000) 대단히 낮은 확률인 걸 생각해 보면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이 정말 좋았죠.
저는 조금 내성적인 성격이에요. 남자 친구들과 있을 땐 오히려 거침없는 개구쟁이 모습도 있지만 이성을 사귀면서 그런 모습을 쉽게 드러내진 않았었죠.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며 가치관과 성격이 조금씩 바뀌면서 사람을 대할 때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반대로 제 고집이 더 세진 면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게 조금씩 어려워졌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내와 있을 때 마치 제가 중학교 때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어요. 철부지 모습도 보이고, 제 속마음이나 생각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도 아내는 공감해 주고 따뜻하게 받아줬죠. 저의 저질스러운 농담과 몸개그에도 항상 눈물이 날 정도로 깔깔 웃어주었고요.(현재진행형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꾸미지 않고 솔직한 모습으로도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어요.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아찔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원래 굉장히 감성적이고 민감한 사람이었어요(INFP입니다...). 아내도 감성적인 사람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사람이었죠. 결혼 초기엔 제가 감정기복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싸움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혼자서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이유는 다양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별 볼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항상 기다려줬습니다. 다그치지도 않고 짜증도 안 냈어요. 그냥 가만히 있다 보면 저도 다시 동굴 밖으로 나오곤 했죠. 저는 더 이상 제 감정에 휘둘리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아내가 옆에서 든든히 있어준 덕분에 제 불안한 감정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제 뉴질랜드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굉장히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꿈을 찾아 뉴질랜드로 떠났으니까요. 그것도 매우 즉흥적으로요. 하지만 아내는 꽤 현실주의자예요.(ISFP) 굉장히 비슷한 성격을 가졌지만 현실감각만큼은 양극단으로 갈려있는 것이죠. 그런데 부부로 6년을 넘게 살다 보니 현실감각이 끝과 끝에서 점점 가운데로 모이는 것 같아요. 아내는 점점 꿈을 꾸는 사람이 됐고 저는 점점 꿈에서 내려와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어느 정도의 절충선에서 현실적인 꿈들을 함께 꾸는 상태가 됐습니다. 죽을 때까지 교사를 '꼭'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이제 다른 것들에 꽤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저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현실적인 대책들을 세우며 살고 있고요. 부부가 닮아간다는 말이 틀리진 않은가 봅니다.
아내 덕분에 친구들을 만나지 않아도 힘들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아내가 제 베스트 프렌드니까요. 가끔 아내는 아쉬운 소리를 합니다. 저와 조금은 더 로맨틱한 부부생활을 하고 싶을 때도 있는데 제가 너무 (ㅂㅇ) 친구처럼 행동한다고요. 저도 가끔 반성은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내를 너무 사랑하지만 갑자기 장르를 로맨스로 바꾸려니 뭔가 낯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장르를 조금 다양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아내 덕분에 제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아내가 요즘 chat GPT로 사주 보는 거에 빠져있는데 사주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를 엄청 도와주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전 사주를 믿진 않지만 그 말은 정확히 맞는 것 같습니다. 전 아내 덕분에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 덕에 예쁜 자식도 낳았고요. 저도 아내에게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