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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자까 Mar 17. 2020

전 올해 27살로 아직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참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다



1. 똑똑한 애 옆에 똑똑한 애 옆에 애매하게 똑똑한 애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
1-1. 물론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 예술,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원하는 전공으로 원하는 대학에 갔고 그 안에서 독야청청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취미가 전공이 되면 흥미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내 전공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지적 허영은 둘째가라면 서운할 지경이라 매사에 지적인 대화를 즐겨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쩐지 엄청나게 명석하고, 학식이 뛰어나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게 되었다. 그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으니, 어쩌면 나도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 


똑똑이 친구들과 그 사이에 위장한 나

1-2. 물론 그런 나의 모습도 완전히 사기는 아닐 것이다. 나라고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진 않다. 공부를 즐겨하고, 지식과 성찰에 대한 열망이 있고 행동력도 있고 머리도 어느 정도 굴러간다. 먹는 대로 토해버리는 전두엽이 아니라면 최소한 조금은 남아있는 지식이 있지 않겠는가.  
1-3.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정말, 잘 모르기 때문이다. 



2. 내 가까운 친구들은 참 학구적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할 땐 대문호와 철학자들을 농담처럼 쓴다. 하지만 난 그 문호와 학자들이 정말 무얼 했는지 강의를 할 순 없다. 아무리 서당개 경력이 n 년이지만 천자문부터 주역까지 외우는 건 무리 아니겠는가.
2-1. 예를 들어 우리 사이에선 칸트가 자주 언급되는데 나는 3대 비판을 제대로 읽어본 적 조차 없다 (사실 시도는 했으나 얼마 못가 포기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칸트가 매일 규칙적으로 산책을 즐겨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주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있다. 하필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가 아도르노의 본고장에서 공부를 하며 아도르노의 저서를 번역하고 있어 그의 얼굴과 이름만큼은 고등학교 친구처럼 익숙하지만 내가 아는 건 아도르노가 대머리라는 것이다. 

블링블링한 아도르노의 머리. 거울 셀카도 찍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음악은 베토벤이나 쇤베르크 정도이며, 스스로 작곡을 하기도 했는데 그건 전혀 유명하지 않다고 한다. 역시 비평가는 비평을 하는 게 잘 맞는가 보다. 어쩔 수 있나. 
2-2. <밝은 방> 롤랑 바르트는 나의 전공이 사진인 이상 알 수밖에 없는 인물이고,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는 친구들이 모두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 중 하나이며 나 역시 그의 이론을 몇 가지 접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빛나는 저서들을 제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푸코도 대머리였고, 바르트와 사귀었단 이야기뿐이다. 여성 학자도 마찬가지다. <제2의 성> 저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연애편지가 꽤나 흥미진진하다고 한다. <젠더 트러블>의 주디스 버틀러는 굉장히 잘생겼으며, 그의 아들 아이작은 엄마가 두 명인 것보다 두 엄마가 다 학자라는 게 더 놀랍다고 말했단다. <사진론>, <타인의 고통>으로 잘 알려진 수잔 손탁과 전설적인 패션 사진작가 애니 래보비츠는 찐사랑을 했다! 

버틀러는 잘생겼다! 

2-3. 물론 제대로 공부한 전공 분야까지 이렇게 날탕으로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본디 전공은 알면 알수록 거대하고 심오해지기만 하는 분야가 아닌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를 하며 바바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를 읽었을 땐 내가 사진을 다 아는 줄 알았는데 4년을 공부하고 대학원까지 오니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새발의 피라는 사실만 증명되었다. 감히 내가 아는 것이 절대로 옳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는 우선 논문이나 책을 읽고 신뢰할만한 레퍼런스인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2-4. 이런 결벽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다. 진짜인 줄 알고 숙지하고 있던 문장이 사실은 모든 개념을 거칠게 압축시켜버린 허술한 문장이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해석 자체가 잘못된 책이었다던지, 알고 보니 신뢰하기 어려운 저자의 공신력 없는 글이었다던지. 쉽게 읽혔단 이유로 깔끔하게 써졌다 생각하고 신뢰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5. 안타깝게도 나의 공부머리와 비판력은 예리하지 못해서 그런 허점을 빠르게 캐치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 이후, 어떠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땐 가급적 전공자 친구에게 책과 논문을 추천받는 버릇을 들였다. 그들도 나에게 확신 어린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 역시 나처럼 자신이 가진 정보를 확신하진 않는다) 나보다는 빠르고 정확한 편이기 때문에. 무한히 흐르는 정보의 바다를 쓸모 있게 이용하려면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 되어야 했다.

2-6. 즉 나는 서당개 경력이 길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없으며 전공이라고 해도 제대로 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공부란 할수록 어렵고 모르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뭘 어떻게 확신을 갖고 아는 척을 하느냔 말이다. 알면 알수록 신묘하고 알쏭달쏭해질 뿐인데. 



3. 인생공부도 마찬가지다. 
3-1.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경험해본 것이다. 상대가 한 경험에게 '나도 그런 적 있어서 뭔지 알아'라고 말하는 건 갈수록 주저하게 된다. 그 사람의 경험이 나와 같을 수도 없고 같다고 한들 내가 그 사람이 아니기에 정확하게 그가 느낀 것, 그가 알게 된 것이 나와 동일할 거란 보장이 없다. 
3-2.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역시 한때 오지랖이 넓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일에 많은 신경과 관심을 쓰는 편이었다. 특히 나와 비슷한 종류의 경험과 아픔을 겪었다는 사람이라면 더욱 관심을 쏟았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서로가 서로를 100퍼센트 소통할 수 있으며 오해가 없을 거라 믿었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모두에게 이해와 공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 어린 나의 말 앞에서 상대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우리는 어쨌든 너무나 별개의 존재고, 별개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같은 정보를 넣어도 다른 값을 도출해내는 게 사람들인데, 나는 그 가능성을 간과한 채 아무런 장치 없이 날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 결과는 예상하다시피. 
3-3.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기 두려워진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당사자만 작업을 주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사자라 해서 반드시 무결함을 보장받지도 않을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정말 '안다'라고 보장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내가 속해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사회 이슈를 작품으로 끌어오는 것이 나에겐 가장 어려운 작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가장 속이 편한 작업은 역시, 내가 살아온 삶과 경험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4. 그게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니까. 단지 좀 더 다양한 작업을 해볼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들 뿐이다. 그러나 나의 작업 경험을 쌓겠다는 간단한 이유로 대상에게 무례를 범한다거나 -끔찍하게도-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작업이 나오게 될 바엔 신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경험을 쌓는 것과 상대의 존엄 중 뭐가 우선이겠는가.



4. 그래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내지 않은 지식과 경험을 확신에 찬 논조로 말하는 자. 자신이 무언가를 진정 안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리 알아보려 애를 써도 결국 내가 '모른다'는 것만 알게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선명하게 말하는 그 자신감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본인이 진실로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사이비 교주가 된다고 하니 부러워도 따라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4-1. 물론 이 역시도 나는 내 판단이 꼭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공부에 있어선, 자신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우기는데 학식이 엄청나게 높은 사람은 별로 본 적 없는데 정작 책 한 권 대충 읽은 사람들이 가장 확신에 차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 후자의 사람 중 하나였기도 하다.
4-2. 어쩌면 지금도.


5. 이렇게 모든 걸 불확실하게만 보고 아무것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답답해 보일지 모르는데 사실은 반대다. 오히려 내가 이 불명확함을 상당히 즐기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5-1. 그래, 난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어차피 제대로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앎'의 기준은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인생은 나름 이만큼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아직 나도 나를 잘 모른다. 그런데 뭘 안단 말인가. 세상에 완전하게 아는 게 가능은 하겠는가. 하지만 다 안다면 과연 재미있을까?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라서 더 흥미진진한 게 아닐까?
5-2.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영원불멸의 진리도 없으니 끝없이 고민하고 찾아다닐 수 있다. 나 역시 무언가를 알게 된 상태의 똑똑하고 박학다식한 나보다도, 무언가를 알아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나에게서 자존감을 채우고 있다. 끝도 없는 질문에 답을 내리다가 또 질문을 발견하면서 삶의 동력을 발견하고 있다. 

5-3. 삶은 계속된다. 내일 일도 우주도 이 지구도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5-4. 그 모름에서 오는 짜릿함. 



6. 내가 본 세상은 오직 동굴 밖의 빛이 그려낸 그림자일 뿐이며 나는 동굴 안의 죄수일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잠시 상심했지만 그림자가 자극하는 상상력은 나를 계속 살고 싶게 만들었다. 

6-1. 그러니까 받아들이고 즐겨보자. 
6-2. 어차피 우린 아무것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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