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하면서
아주 사소하고 간단한 일부터 시작한다. 현 상태에 대한 진단은 생략해도 괜찮다.
집안은 엉망이다. 지하층의 쓰레기 분리수거장까지 내려가기가 막연하고 아득하게 느껴져서 여기저기에 항상 뜯어진 박스와 포장 비닐이 굴러다니고, 분명히 언젠가 - 그것보다도 좀 더 빈번하게 - 필요하기 때문에 가까운 자리에 꺼내둔 모든 것들이 모든 곳에 널브러져 있다. 식기 세척기에 돌릴 수 없는 빈 캔과 포장 용기와 음식물 쓰레기들이 있고 느리게 마른 옷가지들은 며칠 때 건조대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상이 우선이다.
글을 쓰고 타이핑을 하기 위한 데스크와 의자는 목적에 기능할 수 없게 온갖 잡동사니로 점령당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위의 열거한 수많은 엉망진창의 구역구역들의 엉성한 목록 맨 위에 이 데스크와 의자를 놓고, 나머지 아래 목록에는 기약없는 유예를 허락한다. 약간의 치팅이다.
어째서 데스크가 맨 먼저였는가, 이렇게 복잡하고 너저분하게 얽힌 공간과 긴밀하게 오밀조밀 엮인 나의 머릿속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중인 자아가 며칠째 어쩌면 몇 개월째 내게 이렇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써, 네 이야기를. 뭐가 얼마나 사소하고 허탈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데도 불구하고 네 사지를 가느다란 거미줄로 몇 겹씩 잡아 끌어내리는 것처럼 불편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어째서 지금 엉망진창인 집안의 모든 공간들 중에서 당장 타이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업 공간만 치우는 것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는가. 이 서두는 ADHD에 관한 이야기이고 객관적이지 않은 아주 사적인 나의 근황에 관한 이야기다. 읽는 이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맥락적인 보충으로써 근 몇 개월 간 어찌 지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작년 말과 올해 초에 나는 또다시 지독한 우울삽화 기간을 지나쳤다. 이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러시안 룰렛처럼 멸망의 시계가 돌아가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 기후가 날뛰는 와중에 용량을 많이 낮췄던 항우울제가 부족해졌지만, 덤덤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살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심장을 옥죄고 머리가 울리는 존재의 고통을 기약없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중증 우울 삽화가 오, 세상에. 진짜 존나 버티면 어느새 지나가 있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개같지만, 이것은 나를 영원히 지배하지 않는다. 이 고통에는 끝이 있다. 약을 먹고, 쉬고, 덜 중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압박감을 떨쳐내고, 도움을 요청하고, 못하겠다고 말하자. 자책감이 들고 최악이겠지만, 최악은 최악이기 위해서 지속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요령을 터득한 덕에 얼기설기 다시 일어서서 꾸준한 루틴으로 원고 작업을 했다. 한달 정도 무리없이 해낼 수 있었다. 아마 그게 지속되었으면 또 나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생각도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우스개소리로 브런치는 퇴사한 직장인들이 퇴사 후 뭐하고 사는지를 쓰면 작가가 되고 그런 글이 팔리는 블로그라고 이야기들 하던데 나는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다 반대로 프리랜서로 지내다 갑자기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한 얘기를 적으려는 참이다. 뭐... 퇴사썰보다도 색다를 건 없겠지만, 어찌되었든 입사는 해봐야 퇴사썰도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농담거리는 되지 않나.
미안. 하지만 이 글은 퇴사는커녕 젠장 저는 회사 계속 다니고 싶으니까 자르지 말아주세요 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행해 써야만 하는 포스트다.
일단 우연히 찾아온 정규직 입사 기회는 내게 분명한 행운이고 기회가 맞았다.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고 유의미한 조언을 해주는 동료들과 인간적인 분위기에 무엇보다 내 적성에 너무 잘 맞았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야였고, 즐겜러로서의 내 자아를 긍정하기로 한 나는 이 기회를 감사하게 여긴다.
발목을 잡은 건... 아니, 한 가지 괴로웠던 건 ADHD다. 퇴근하고 12시도 되기 전에 잠드는 성실한 루틴으로 살아도 10시까지 출근을 지키기가 죽기보다 힘들고 습관이 되지를 않았다. 매일매일 출근이 가장 큰 과업이고 전쟁같이 느껴진다. 유연 출근제라, 수습 기간이 지나 좀 더 여유가 생긴 다음에도 젠장 점심시간 전에 출근이 지옥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사무실은 편안하고,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나는 기본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이라 그저 오피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꽤나 큰 도움을 얻는데도 그냥...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하고 외출을 하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이 되지 않는다.
입사 두 달 차에 이사를 했다. 신입 월급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월세지만, 통근 시간까지 포함해 원래 프리랜서로서 가지고 있던 계약을 위한 개인 작업에 손도 댈 수 없는 물리적 제한을 돌파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냥... 이 글의 핵심은 아닌데,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가끔 봐야겠다 싶었다.
처음 자취 독립이기 때문에 가구는 거의 다 새로 사야 했고 와중에 전쟁같은 통근이 (이하생략). 하지만 통근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었고 무리를 해서라도 여유있는 평수의 독립 공간을 갖게 된 건 정말 좋았다. 근데 뭐 당연하지만 수습도 안 지난 신입이 이사했다고 느긋한 시간을 갖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대가구도 몇 주에 걸쳐서 도착하고 소가구나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신데렐라의 요정 대모가 호박 마차 만들어내듯이 이사만 하면 곧장 건설적으로 자고 일어나 빨라진 통근을 하고 여유시간에 개인 작업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 이렇게까지 오래 못할 줄은 몰랐다. 삶은 예측불허고
식물에 꽂혀서 그 정리가 영원히 마무리되지 않는 혼돈의 기간 동안 화분들이기와 등등등에 시간을 할애한 것도 원인이라면 원인이지만 이것 마저 안했으면 오히려 일상에 아무런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휴식과 시선 돌리기로 좋은 취미였고 아무튼 내 식물존은 잘못이 없다.
식물존은 잘못이 없지만 화분 선반을 조립하려다가 원목 자재 하나를 기가 막힌 에임으로 발가락 위에 찍어 버린 것은 잘못이었다. 내 잘못.... 생전 처음으로 골절 진단을 받았다. 찍힌 발가락은 뭐... 박살이라고 할 정도로 그냥 분쇄가 됐다고 했다. 어쩐지 어디 찍히고 부딪히는 거야 일상이라 피멍이 들어도 어디서 생긴 건지 잘 모르는데 눈물이 쏙 나오게 아파서 친구한테 육두문자로 가득찬 호소를 보내고 정형외과에 달려가보게 하더라만은.
... 아무튼 그냥 걷지를 말라기에 재택 근무를 몇 주 했다. 반깁스를 차고 장마가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 암튼 다 무리였다. 뼈 안 붙으니까 돌아다니지 말란 말이나 들었다. 드디어 반깁스를 풀어도 되겠다는 3주 뒤의 진단을 받고 아싸 귀가하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났다. 아니... 내가 찾아가긴 했다. 한 번만 보고 올 거야, 속삭이면서. 식생활에 꽂혀서 딱히 거래는 하지 않았는데, 동네 당근마켓을 들여다보는 게 소소하게 즐거웠다. 그거 말고 커뮤니티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하필 그 전날 자기 전에 그걸 봤다. 집에서 8분 거리, 역 근처 번화가에 먹자골목에 모텔촌과 개천 산책로와 대형 영화관과 아무튼 서울의 심연같은 길목에 상태가 꾀죄죄한 새끼 고양이를 찍어 올린 사람이 있었다. 이 지역의 길고양이 관련 자원봉사 단체에 대한 정보를 댓글로 달고 구조하려는 의사가 있어보이는 댓글을 다는 분을 응원했다. 복받으실거예요.
원래 다니던 정형외과의 일요일 진료 마감이 지난 바람에 좀 먼 병원을 다녀 오는 길에 그 골목이 있었다. 글이 게시된지 20시간이 지났고 대낮의 기온은 30도를 넘고 진짜 드럽게 더운데 그 주 부터는 장마가 예보되어있었다. 사진 속 새끼 고양이는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말이 아니었는데, 장마철에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면 딱 죽기 좋다.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다면 위험하려나... 아니 이 골목에 이렇게 와본 적은 없는데 진짜 대낮에도 통행량도 너무 많고 차도 다니고 술집 천지라 남자도 많고.
눈에서 진물을 흘리는 손바닥만한 새끼 고양이도 있었다. 아 절대자시여
편의점에서 생수랑 일회용 용기를 사서 앞에 놔주고 30분을 땀을 흘리며 주변에 비명과 경악 섞인 연락을 돌리며 고민을 했다. 개천 산책로에서 살던 오리 가족에게 돌팔매질 한 남중생들 기사를 떠올리며 나를 포함한 인류를 욕하고 저주하는 와중에 그 30분 동안만 성인 남자 셋이 이 꾀죄죄한 새끼 고양이와 상대적으로 너무나 포동하고 뽀송하고 야무져보이는 동배 형제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갔다. 아 수컷들이여
근처에 밥자리가 있는 애기들이라고 했다. 어쩐지 손은 타지 않지만 영업장 앞에서 까불까불 놀고 있더라니. 동배로 보이는 아이는 당근 커뮤니티에 제보도 안됐고 눈에 진물 흘리는 애에 비해 건강하고 재빨라 보였다. 사진에서 봤던 꼬질이는 하악질을 하면서도 너무나 싱겁게 맨 손에 덜렁 들어올려졌다. 밥자리가 있고 사람 경계도 하는 똑똑한 애는 겉보기에 말끔히 건강해서 구조를 요하는 거 같지 않았다. 지역 길고양이 돌봄 커뮤니티에서도 꼬질이만 보고 다들 어떡하나... 하다가 한 분이 '약이라도 넣어주지 않으면 안구 적출해야 할텐데' 하셨을 뿐이다. 그 말에 덜렁 집어든 것도 있다.
그래서 깁스 풀자마자 눈에서 진물을 흘리고 원충 치료를 해야 하는 새끼 고양이가 인생에 들어왔다. 임보해서 입양 보내려고 했는데 처음의 그 충격적으로 작고 마르고 꼬질한 인상과는 달리 너무나 빨리 회복하고 건강해져서 지금 내 뒤 침대에서 에어컨과 해 쬐면서 누워있다. 이럴 수가 진짜
만 한 달 중에 3주는 약을 먹이고 안약을 넣고 고양이 물건을 배송받아 겨우 설치한 다음 기절하고 그러면서 지냈다. 그런 와중에 아시다시피 코로나가 죽지도 않고 또 유행을 탔고 나는 타이밍 좋게 몸살을 앓았다. 말이 몸살이지 스트레스성 발열과 편두통을 달고 살았고, 골절 때문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으니 그냥 아니 왜 이렇게 피곤하냐 너무 힘든데 (당연하다 육묘까지 더해졌잖냐), 하면서 제발 걍 양성 떠서 속 시원하게 재택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시든지 기도하면서 이주도 넘게 병원을 다녔다. 몸살 감기가 오래가는 걸 어떡하나 그냥 쉬어야지.
오늘 푹 쉬면 낫겠지 하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도 글러서 매일 당일 병가를 내면서 압도적 죄송 저의 불찰해봐라 나을 병도 스트레스가 막을 텐데. 게다가 아프지 않을 때도 나의 근태는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단 말이다. 나는 아이디어나 레퍼런스나 센스가 좋고 요령도 좋고 일도 빨리 잘 하는 편인데 출근을 잘 못한다. 그걸 사회에선 기본으로 부른다. 나의 ADHD는 내 재능과 역량이 어쨌든 간에 나를 기본도 안된 사람으로 살게 하고 사회의 기본에 대해 체화했기에 나의 발달 장애를 이해하면서도 이것도 못하는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질시하고
막판엔 가는 의원 약국에마다 거의 울면서 호소를 했다. 문진에서 내가 정신과 다닌다고 먹는 약을 읊어줬더니 소변 혈액 검사에서 염증 수치도 안 나왔는데 정신과적 문제 아닐지 내과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2, 3주 가까이 똑같은 증상에 들쭉날쭉한 고열로 찾아오면서 코로나 음성이 뜨는 환자라는 걸 드디어 알아챈 집 앞 의원에서 종합 병원 인계 소견서를 써줬다. 거기서 대학 병원으로 옮겨 갔더니 대뜸 입원을 하라고 했다. 네? 그렇게까지?
ㅇㅇ 그렇게까지.
세균 감염으로 인한 급성 신우신염과 골반염.
와 뒤지게 아팠겠다 싶은 진단명을 보면서 용썼다 싶어졌다. 제대로 항생제를 쓰고 입원 관리 중에 ADHD 약인 아토목세틴과 콘서타를 정말 오랜만에 쉬니까 처음 하루 동안은 낙상 고위험이라고 화장실도 못가게 저혈압이 나와서 비몽사몽하게 잠만 잤다. 그러고선 싹 열이 내렸다. 퇴원할 때 일과 처리를 하려고 콘서타를 다시 먹었더니 대번에 열이 38도로 올라갔다. 하하 무리해서 각성제 끌어다 깝치지 말라고 몸이 이러는 구나.... 근데 어쩌라는 거냐 얼마나 힘들든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다시 삶을 재건해야 했다. 회사에 저를 짜르지 마시고 저의 이런 점을 고려하신 뒤 적재에 쓰시라는 연락을 드려야 하고 개인작업 루틴도 만들어야 하고 더럽게 비싼 월세를 내면서 이렇게 더럽게 살 수는 없기에 집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좌충우돌 다이나믹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은 근 몇 개월의 내 일상 일부를 정리해 적어야 했다. 왜 적어야 하냐면... 이렇게 명문화(?) 해 적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고 엉켜있는 내 내부의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이걸 적기 위해서 데스크를 치워야 했다.
데스크를 치우는 일은 집안 전체를 막막하게 바라보며 어떻게 하지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다. 매일 반주를 해도 간수치가 멀쩡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간으로 술대신 약을 들이붓는 구나 싶은 약상자들을 죄다 종이 재활용에 모아두고 맥북을 세팅하고 연결하고 그 외 쓰레기를 버리고....
이 모든 꼬이고 웃기고 눈물나는 복잡한 문제 과정의 해결책을 궁리하느라 복잡한 머리를 한 번 털어내고 딱 하나만 남긴 결과가 이거였다. 응 부엌도 드럽고 거실 쪽도 난장판이야. 하지만, 데스크를 치우고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적어. 그 다음에 어떤 기분이 드는지, 더 뭘 할 수 있는지 보자고. 별로 못하겠으면 그만큼만 할 수 있었던 거구나, 하고.
근데 여러분 그거 아시나, 이렇게 그나마 가장 사소해보이는 하나와 그 다음 스텝을 하고 나면 꽤 명료하게 다음에 할 수 있는 작은 것과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안들면 쉬어라... 할 만큼 했나 보지.) 나는 이제 부엌과 사투를 벌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