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미적 실존주의자의 길티 플레저, 영화 <어톤먼트>

작가의 품위로 속죄 대신 탈옥하는 브리오니

by jeudi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볼 때 저의 직관적인 대답엔 기준이라고도 없고, 카테고리도 없는 편입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허공에의 질주>, <로그원>, <더 포스트>, <시티라이트>, <매드맥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붉은 돼지>, <화양연화>.... 장르도 시대도 제각각.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미장센이 극도로 훌륭한 영화라는 정도?


그래서 제가 가장 집착적으로 반복해서 감상하고 스토리의 테마엔 전혀 관심 없으면서도 원작까지 찾아 읽은 영화, <어톤먼트>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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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은 원작과 같습니다. 원작 작가 이안 매큐언이 테마로 삼는 것은 <속죄>입니다. 정확히는, 작가의 속죄. 포스터에 등장한 두 연인은 아주 짧게 등장할 뿐이고, 영화와 원작 전체는 세실리아 (키이라 나이틀리)의 동생 브리오니 (시얼샤 로넌)이 언니와 연인에게 저지른 잘못에 억눌려 살다가 소설 집필을 하게 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브리오니는 집필이 그들에게 베푼 마지막 친절이었다고 말합니다. 원작의 브리오니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 연인들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산다. 내 마지막 원고만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의 즉흥적이고 운 좋은 언니와 그녀의 의사 왕자님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 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 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진술을 보면서 저의 감상을 거칠고 냉소적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았습니다.


"하여튼 작가란 새끼들은. 작가 같은 새끼들이나 할 짓이다."


조금 풀어서 추궁으로 어조를 바꾼다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전능감이란 도파민에 절여진 게 작가란 새끼들이니까. 근데 그걸 진심으로 믿나 보네? (하여튼 작가란 새끼들은.) 네가 펜대로 개입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주제 파악을 해야지."


저는 브리오니를 단죄하거나 심판하는 데에는 관심 없습니다. 브리오니의 죄 (세실리아와 로비가 나누는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투한 어린아이가 아동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인으로 로비를 무고한 것)가 구체적으로 왜 나빴는지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오히려, 브리오니가 작가로서의 전능감의 확대로 자의식이 지나치게 비대해 로비와 세실리아의 죽음 자체를 자신의 죄라고 호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브리오니의 죄는 정확히 명예 말살, 무고입니다. 그 결과는 로비의 사회적 존엄 훼손과 투옥이고요. 간접적으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을 망쳐놓았습니다.


그 후로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가 대피 중 폭습으로 터진 수도관 때문에 익사하거나, 석방을 받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 출전한 로비가 패혈증으로 사망한 건 수많은 인과 개입의 결과입니다. 엄밀히 말해, 브리오니에게는 고작 죄 몇 번 저질러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할 힘 따위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로비와 세실리아는 독일의 미치광이가 일으킨 집단 광증의 결과로 죽은 것에 더 가깝습니다. 대전이라는 재앙은 인간의 생존 확률을 종합적으로 공격하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저는 작품을 논할 때의 내부 규칙을 깨고 살짝 밖으로 나와 작가의 논리를 찌르고 싶습니다. 작가끼리 터놓고 얘기해 보자고요. 로비와 세실리아가 죽은 건 아름다운 서사를 욕심낸 작가가 개연성을 확보한 작업입니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이언 매큐언이 브리오니를 통해 작가라는 전능한 존재가 허리를 굽혀 굳이 속죄로써 집필하는 품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서 죽게 한 겁니다.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기에, 비극적인 모습으로. 이것은 포르말린입니다. 로비와 세실리아를 포르말린해 갈아 넣은 잉크로 브리오니가 작품을 씁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건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원작 속 브리오니의 독백에서 바라 마지않는 것처럼 진술한 그 일이 현실이라고 쳐 봅시다. 로비와 세실리아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샤넬 광고 같이 아름답고 감각적인 조 라이트 전매표 미장센과 렌즈 필터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현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로비는 아동 성폭행을 저지른 범죄자로 낙인찍혀 있고, 세실리아는 그런 로비를 사랑해서 가족과 의절한 채 원래의 계급을 버리고 고되게 살아가는 간호사입니다.


무엇이 바뀔까요? 브리오니가 집필하는 작품의 미적 구도가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브리오니는 감히 펜대로 그들에게 삶을 선물할 수 없게 되고요. 이제 그들의 삶은 지루하고 숨 막히고 냉엄한 다큐멘터리가 될 겁니다.


이언 매큐언이 브리오니에게 준 작가로서의 전능함은 엄밀히 말해 작가라는 현실의 생활인이 가질 수 있는 서사 권력을 과대평가한 것입니다. 이건 비대한 에고죠. 애초에 이 구도에서 브리오니가 썼을 작품 속에서조차 로비와 세실리아의 아름다운 삶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 작품 속 행복이란, 영화 <타이타닉> 속 죽은 로즈가 타이타닉 속 호화로운 선실에서 다시 젊어져 잭과 재회해 키스하는 마지막 씬과 같습니다. 그 축복받는 사랑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극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거든요. 여기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와 미감은 지켜보는 관객이 느끼는 겁니다. 브리오니 책의 독자들이요. 브리오니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대놓고 묻죠. 현실대로 세실리아와 로비가 죽었다면 독자가 무얼 느끼겠냐고요.


하지만 세실리아와 로비가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행복해야 하는 이들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에 그런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없거든요. 그들은 각자 자신의 욕망과 의지로 살아갈 때 진정으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살아있는 자의 생생한 존엄이라는 것이, 이언 매큐언이 그리고 싶어 한 전능하게 속죄하는 작가의 고상한 모습과 충돌합니다. 그렇기에 로비와 세실리아는 젊고 아름다울 때 서로 애틋해하며 죽어줘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세실리아와 로비를 죽인 진범은 이언 매큐언입니다. 작가는 물론 인물을 죽게 할 수 있죠. 이 얘기는 어떤 인물에게 과도한 주체성을 (실제로 한 개인이 다 가질 수 없는) 몰아주고, 어떤 인물을 의미와 상징으로 얄팍하게 소재화 할지 선택한 작가 내부의 논리적 정합성이 깨졌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피해자는 반박하고, 분노하고, 증언을 요구하고, 책임을 묻고, 사회적 수선을 요구합니다. 죽은 피해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요. 그러니 로비와 세실리아는 적당한 때에 죽어줘서 브리오니가 집착적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집필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이 안에 자기모순이 발생하고 맙니다. 브리오니의 작품은 태생적으로 그들의 죽음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필력으로도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삶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다는 걸 이언 매큐언은 간과합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실존주의적인 말을 끼워 넣겠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죽으면 끝"이라는 말입니다. 세계는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로 떠난 이들 뒤에 남은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죠. 생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애당초 브리오니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종신형은 개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로비와 세실리아가 죽었을 때, 브리오니는 자신의 죄를 영원히 되갚을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굴레에 이미 갇혔습니다. 죄와 벌은 산자의 것이거든요. 죽은 자는 용서하지도 않고 의미를 복구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도 명예도 산 자에게 의미를 갖는 것이니까요.


지극히 냉정한 윤리 기준이 제시됩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잘못이기 때문이지만, 어떤 잘못은 어느 순간 정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로비와 세실리아가 죽었을 때 브리오니가 돌이킬 수 있게 되는 건 없습니다.


브리오니의 고상한 집필은 로비와 세실리아가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퍼포먼스입니다. 이걸 속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언 매큐언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작가라는 종족에게만 주어지는 펜대를 통해 브리오니를 감옥에서 탈옥시킵니다. 브리오니는 진심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미를 찾죠. 다시 말하지만, 로비와 세실리아가 정말 살아있었다면 그 노력은 애초에 시도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었든 살았든 진정한 노력은 작가의 전능함이라는 에고에 취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기서 앞서 명확히 한 브리오니의 죄를 다시 살펴봅시다. 브리오니는 명예 말살을 저질렀습니다. 이 세계에서 직접 로비를 죽게 한 패혈증이나 세실리아를 죽게 한 폭파 수도관은 브리오니와 무관합니다. 죄를 갚기 위해 로비를 전쟁에 보내지 않고 세실리아를 다른 대피소로 보내는 것은 브리오니가 할 일이 아닙니다.


브리오니가 해야 했던 일은 고상한 집필과 조금도 가깝지 않습니다. 수치스럽고 고생스럽게 증언을 번복하러 가야지요. 로비는 결백하고, 진범은 폴 마샬이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실이 증명될 때까지 법정을 드나들고 재력가 진범의 위협을 견뎌야 합니다. 자신의 피해사실을 들추길 원하지 않는 피해자의 원망도 견뎌야 하고요. 상류층으로 사실 로비의 결백엔 큰 관심도 없는 가족들에게 세실리아를 변호해주어야 합니다.


이 일엔 미감이 없습니다. 현실의 절차와 투쟁일 뿐이니까요. 대신 브리오니는 정말로 속죄하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작가적 해리에 빠지지 않고요. 이언 매큐언이 브리오니에게 부여한 작가적 해리는 다른 세계관(현실)에서 발생한 이해관계의 잘못을 새로운 세계관 (브리오니의 작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어톤먼트>, 즉 <속죄>는 작가가 타인의 삶을 얄팍하게 소재로 삼는 가장 천박한 방식, 무분별한 낭만화를 문제의식 없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윤리의 실행'처럼 포장하는 작품입니다. 이건 문학의 힘이 아니라 문학이 자주 저지르는 월권이죠. 이언 매큐언이 브리오니를 비판감으로 내세우고 싶었다면 텍스트에서 쾌락과 숭고함의 배치를 다르게 썼어야 합니다. 최대한 선해하더라도 그가 본능적으로 미려하게 써 내린 글은 전능적 작가 에고에 취한 브리오니를 너무 진득하고 자세히 오래 다룹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면 결론은 같습니다. 저는 지극히 실존주의자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다루는 일련의 집필이라는 테마에 대해 냉소합니다. 말 그대로, 작가 같은 전능감 중독자가 할 법한 짓이고, 그래도 그걸 진짜로 이렇게까지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물론 이런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영화를 백 번쯤 보고 원작 소설까지 찾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교조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저는 미장센이 아름다운 영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어톤먼트>의 미장센은 지리멸렬하게 집필하고 죄의식을 우회해 양분으로 삼는 과정들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사실 그런 지난한 시퀀스들로 유명해지지도 않았죠. 이 영화를 떠올리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가 입은 우아한 녹색 드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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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 속 로비와 세실리아가 등장하는 모든 시퀀스를 사랑합니다. 어긋나는 시선, 서로의 의도를 비관하면서도 기대하는 시니컬한 대화, 참지 못하고 서로에게 붙박이는 눈동자, 날것 그대로의 색정적인 욕망을 타이프했다가 하늘을 보며 터뜨리는 웃음, 결국 폭발하듯 서로를 탐하며 엉켜드는 몸짓. 그리고 억울한 투옥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소년다움을 잃지 않은 로비의 맑은 눈동자, 범죄자인 연인을 위해 풍족한 가족과 의절하고 교대 근무로 누구보다 고된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그 눈동자를 제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간절하게 뺨을 문지르고 "내게 돌아오라"고 속삭이는 세실리아. 이 장면들은 완벽한 캐스팅에 변태적일 정도로 (칭찬입니다.) 나른하게 구도와 디테일을 살려내는 조 라이트 감독의 집념이 더해져 언제 다시 보아도 저를 매혹하고 맙니다.


이 시퀀스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안에 로비와 세실리아의 모습은 사후 편집이나 억지로 개입해 의미를 이어 붙이려는 노력이 발생하기 전, 그저 살아 숨 쉬고 욕망하고 실수하고 이끌리는 생생한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지독하게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런 '기세'를 사랑하거든요. 판단과 계산과 번뇌에 골몰하기 전, 완전한 의지가 되기 전, 지금 이걸 한다라는 선택을 미루지 않는 힘입니다. 삶은 원래 아무 근거도 없고 보장도 없지만 우리는 선택하고 결과를 껴안아야 합니다. 의미 같은 것들은 모두 나중에 오는 것이죠. 실존주의는 기세에서 탐미주의와 교차합니다. 그 기세가 이루는 순간의 밀도가 바로 아름다운 거 거든요.


사랑의 의미나 상대의 의도를 제대로 따지기 전에 먼저 고정되는 시선과 타이핑하는 손가락. 그 순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밀도는 높아지고 아름다움이 발생합니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죽음을 더 비극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 힘이 들어간 그 연출은 역설적으로 살아 숨 쉬는 두 남녀의 아무 개입도 발생하지 않은 순간들이 진정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부각합니다.


저는 이런 순간들을 집요하게 붙잡으며 영화를 다시 봅니다. 비극의 복선 따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생의 밀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거든요. 따라서 <어톤먼트>는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테마를 다루는 작품이 됩니다. 이언 매큐언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든 로비와 세실리아의 살아 있던 찬란한 순간을 사후에 '의미'로 압수해 버리니까요. 해석이 붙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생동감 넘치는 욕망의 주인들이 대상으로 멀어집니다. 브리오니는 가장 나쁜 각도의 해석자 좌석에 앉고 있고요.


그래서 <어톤먼트>는 저의 가장 오래된 길티 플레저입니다. 제 안의 실존주의는 작품을 성립시키려는 어떤 논리와 개연성 작업도 부인하는데, 탐미적 실존주의가 로비와 세실리아의 영원히 찬란한 생의 순간에 홀리고 맙니다. 이런 역설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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