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 총리의 발언을 비판하며
최근 국무총리의 발언을 보며(참고: https://naver.me/5dANQ00F ) , 작년 겨울 한강진에서 보았던 광장을 다시 떠올렸다. 이 글은 그때 써 두고 공개하지 않았던 기록이다.
먼저 "민주노총 부른다고 했다" 밈부터 한강진에 뛰쳐나간 시민들의 응답 플로우까지 한 번 함께 살펴보자.
한국의 2022년 웹소설 부문 SF 대상을 타기도 한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라는 텍스트는 21세기 후반 혹은 22세기 초반 쯤, 북태평양 해안에 연안 국제 연합으로 세워진 '북태평양 해저기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이 해저기지에 파견된 치과의사를 주인공으로, 이 해저기지가 모종의 원인에 의해 침몰 직전에 처해 누수 중인 상황을 주로 다룬다. 나는 이 소설의 다음 대목을 번역, 인용해 페이퍼의 메인 테마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엔지니어 이지현과 해저기지 소속 해양 생물학 연구원인 유금이의 대화이다. 유금이는 해저기지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실험을 위해 포획해 실험실 탱크에 갇혀 있는 해파리들을 풀어주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자 이지현이 묻는다.
"영혼이 없잖아요."
"예?"
"걔네는 영혼이 없잖아요."
유금이는 일행과 이동하며 찬찬히 그 말에 대답한다.
"19세기 이전 지식인들은 동물에게서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비웃었죠. 동물은 외부 자극에 의해서 그대로 반응을 내뱉는 거라 생각했어요. 핸드폰 알람처럼 소리나는 기계로 동물을 취급했죠. 개나 고양이를 때려 죽여도 아무 죄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여성과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도 동일하게 동물로 취급됐죠.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은 모두 평등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해요."
대답을 마친 유금이는 일행들이 무사히 탈출하는 걸 보면 자신은 랩으로 돌아가 해파리를 풀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이지현이 묻는다.
"……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나요."
"예."
이 짧은 문답 뒤 이지현의 짧은 질문과 함께 일행의 다음 방향이 정해진다.
"금이씨 랩이 말이 멀어요?"
수면으로부터 4천 킬로미터 밑, 해저기지, 침몰 중인 이 공간에서 일행은 탈출을 미루고 유금이의 연구실 수조에 있는 해파리들을 풀어주러 나선다.
존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고통’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생명 정치에서는 제러미 벤담에서부터 시작된 전통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제러미 벤담의 "The question is not, Can they reason? nor, Can they talk? but, Can they suffer?" Jeremy Bentham on Animal Ethics | Daily Philosophy +2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1789년, 17장) 라는 질문을 얼마나 내러티브에 품위있게 녹여냈는지, ‘위기에 처한 인간들이 탈출보다도 먼저 해파리의 탈출을 돕기로 결정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부드럽게 대화로 다루는 방식을 소개하고 싶었다. 소설의 메인 테마로 꼽히는 주인공의 독백 대사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덜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서도 여기를 나갈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선의의 순환을 원한다.”
2024년과 2025년 한국, 서울에서 나는 무너지는 해저기지 대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고통과 감응하는’ 이들의 정치참여와 그들이 이루어 낸 성과를 목격했고, 그 자리에 참여했다. 커다란 광장이 열렸다. 2024년 12월 3일, 민주적 절차와 합법적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쿠데타성 계엄’을 선포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절차적으로 완벽한 탄핵과 법정 구속, 처벌을 촉구하는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12월. 한국의 12월은 모스크바만큼 추워진다. 광장은 참여engager하기에 결코 녹록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시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자리가 광장이 되도록 하고 말았다. 나는 이들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시민 불복종 – 집회 방식에 대해 황홀감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집회’라는 것이 언제나 집회 주체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안다는 점을 전제로 당시의 광장을 증언하려 한다.
“다시 만난 세계”와 같은 대표적인 K-Pop 송이 광장에서 울려 퍼지고 촛불대신 색색의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광장을 채웠다. 주도하는 세력은 누가 뭐래도 2030 여성들이었다. 아이돌 응원봉을 가지고 있고, 시대를 관통하는 스테디 셀러 송을 운동의 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세대 주체들. (“다시 만난 세계”가 광장의 노래로 채택된 경위에도 계보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설명을 줄이겠다.)
나는 아이돌 응원봉을 가진 게 없어서 스타워즈 광선검 장난감을 사서 들고 참여했다. 깃발이 수많이 나부꼈다. 정말 소속을 표시하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지역지부 소속, 퀴어 단체 소속임을 알리는 무지개 깃발들, 하지만 대다수는 ‘피켓’과 다름없는 깃발들이었다.
2016년에 이미 탄핵 집회를 경험해 본 바 있는 시민들은 당시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집회의 배후 세력은 누구냐?’ 라는 질문에 ‘우리 배후는 게임 길드다’, ‘화분 안 죽이기 실천 협회다!’ 라고 응수하며 깃발을 제작해 들고 나가던 전통이다. 좋아하는 픽션 캐릭터의 대사를 들고 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엔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선의의 순환을 원한다.” 깃발도 자리했다.
탄핵 집회 중 큰 궤를 차지한 두 사건이 있었다. 일명 ‘남태령 집회’와 ‘한강진 집회’였는데 나는 후자에 참여했다. 한강진 집회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된 뒤 그의 관저 앞에서 검찰의 피의자 신분 체포를 촉구하는 3일 연속으로 이루어진 집회였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아스팔트 길바닥에서, 시민들은 릴레이로 3일 밤낮을 새며 도로에서 광장을 열었다. 첫째날, 한강진에서 광장이 열린단 소식에 광선검을 들고 영하 14도까지 내려가는 도심 한복판 길바닥에서 밤을 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달려간 내게 광장이 무엇을 보여주었나?
그것은 유토피아와 이데아였다.
한강진의 주역들은 노동조합원들, 그리고 2030여성들, 퀴어, 장애인들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꾸준히 묘사한 것과 같은 재난 현장 속에서 펼쳐졌다는 유토피아를 체험했다. 시위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온라인 연대 시민들이 배달로 주문해준 따뜻한 음식, 음료와 음식 트럭이 끊임없이 현장에 도착해 물품들을 나눠줄 자원 봉사자가 즉석으로 소집됐다. 시위에 릴레이로 참여하러 도착하는 시민들은 핫팩과 보온 용품을 사들고 와 나누어 주었고, 추위 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졸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나 주변을 살피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호하게 깨워주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면 주최 본부에 연락해 앰뷸런스에 태웠다. 몸이 얼지 않도록 세대를 횡단하는 노래들을 계속 해서 틀어놓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주기적으로 일어나 춤을 추도록 독려했다.
무엇보다 정말로, 퀴어 퍼레이드에서보다 더 많은, 더 다양한 정체성의 퀴어들과, 장애인과, 온갖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 사각지대의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계엄 이전에도 존재했던 사회적 병목들을 증언하며 ‘다시 만날 세계’에서 내란이 종식된 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연단에 올라와 떠들었다. “저는 논바이너리 데미 섹슈얼입니다” 같은 정체성 소개로 시작하는 자기소개가 규칙처럼 작동해 ‘시스젠더 헤테로가 여기서는 성소수자다’라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인터넷에선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트랜스 혐오적 공포 조장 발언이 힘이 셌지만, 시민들의 후원으로 보내진 난방버스(몸을 녹이며 눈을 붙일 수 있도록 난방을 틀어준 버스를 도로 광장 옆에 배치해 휴식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후원으로 보내줌)에서는 퀴어와 여성과 금속노조 소속 중장년 남성 노동 조합원들이 한 버스에 섞여 몸을 녹이며 눈을 붙였다. 인근 수도원에서는 시위 참가자들을 위해 몸을 녹이며 쉴 수 있는 성당과 화장실을 개방해주고 따뜻한 물을 퍼다 날라주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성소수자, 장애인, 학교 급식 노동자, 고공 농성(크레인 등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노조원들의 항의 시위 방법) 투쟁 노동자들의 대리인들, 청소년… 사회에서 가장 고통에 노출되기 쉬운 존재들이 가장 살을 에도록 추운 겨울 눈밭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가장 먼저 감응하는 이들이었다.
앙가쥬망을 실천하러 간 현장에서 목격한 유토피아는 나를 다른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어떻게든 그 유토피아와 이데아를 일상적 실천으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벽에 부딪혔다.
광장에서 흩어진 이후 그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대선 투표율의 ‘20대 남성/여성’ 구분으로 정의되지 않는 정치 표현과 정체성을 가진 그 광장의 내 동료 시민들 말이다. 그들은 제대로 정치 세력으로 구분되지 않고 ‘대의 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한 겨울, 비상 버튼을 누른 민주주의를 정상 궤도로 올리기 위해 가장 먼저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나와 가장 추운 곳에서 너무나 선명히 ‘실체로 존재’했던 이들이 바로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의 고통에 더 섬세하게 공명하는 고통받는 이들이 가장 정치 변혁의 주체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가장 험한 곳에서 그들은 유토피아를 만들고 이데아를 이야기했다.
문제는 명료하다. 데이터와 정책이 그들에게 화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측정 권력’의 분배 배치가 불평등하기에 가장 뜨겁게 정치를 변혁시킬 수 있는 존재들을 어떤 데이터로도 수치화하지 않고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혐오 발언이 과대 대표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정 담론장에 나와 용기있게 발언하는 이들은 모두가 공존하며 포용하는 세상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다.
집계되지 않는 공명자들에 대한 수치 부재. 이것을 절망이 아니라 도전 과제로 삼음으로써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장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고 ‘다시 만날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떠들었다. 다시 만날 세계에서 그 유토피아를 일상 실천으로 가져오려면 부재한 데이터와 측정 권력의 재분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이 멋대로 광장의 진의를 왜곡해버릴 테니까. 김민석이 그런 것처럼.)
여기까지가 써뒀던 글.
물론 나와 같은 방식으로 광장을 기억하지 않고 국무총리의 발언이 걸리지 않은 광장의 동료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다름까지 인정하면서, 내가 다르게 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김민석 총리의 발언은 여러 층위에서 문제가 되는데, 첫 번째는 정치적 공로의 사유화이고 두 번째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만든 민주주의를 가장 강한 자본에게 헌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란 탄핵 국면의 팬덤 민주주의는 하이브가 응원봉을 발명했기 때문에 (하이브는 응원봉을 발명하지도 않았고)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응원봉 소비 문화의 첫 번째 향유자인 젊은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민석씨는 한강진에도 안나오고 남태령에도 안오고 민주주의의 가장 추운 해지기 전 새벽녘에는 어디 계시다가 따뜻한 하이브 본사에서 쫀득하게 공로를 남한테 퍼주시는가. 그것도 주식 사기에 국민연금 수천억 포함한 수조원에 대한 책임을 수장이 조사받고 있는 기업?에?? 열받게 하지 말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