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단타대회
규칙은 칼집이다. 아무리 날이 선 칼이라도 칼집이 비틀리면 꺼내다 손부터 벤다.
전광장 천장에 박힌 냉색 조명이 각자의 키보드 위로 고르게 떨어졌다. 심판석 화면에 스코어 수식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점수 = 손익 – {평균 보유시간·체결당 슬리피지·일일 최대낙폭(MDD) 패널티}. 사회자의 목소리는 중립적이었다. 규칙은 늘 감정이 없다. 감정이 없는 것이야말로 잔혹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선 A-2, 프로그램 파도전. 15분입니다.”
사회자가 말하자, 왼편 세 번째 줄 곽도영이 의자에 등을 바싹 붙였다. 굵은 손가락이 키 캡을 세 번 톡톡 두드린 뒤 멈췄다. “파도면 타야지.” 그가 자신에게 들리게 중얼거렸다. 파도는 탈 수 있지만, 늘 해변으로 태워다 주진 않는다.
라운드 개시.
체결음이 가벼운 비 소리처럼 퍼졌다가 곧 북소리로 변했다. 프로그램 매매의 줄기가 호가를 밀었다 되돌리고, 다시 밀었다. 곽도영이 선두로 뛰었다. 상단 호가를 연속으로 베어 물며 시장가 분할 진입 → 즉시 부분청산을 빠르게 반복했다. 그래프가 가시처럼 솟구쳤다가, 곧 얕게 깎였다. 화면 우측 하단 스코어 박스가 깜빡였다. 슬리피지 평균 0.18틱, 평균 보유 9초. 수익은 늘었는데 점수는 줄었다.
“뭐가 깎여….”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내 화면의 수급선을 눌러봤다. 프로그램 순매수가 강할 때일수록 추격 체결의 마찰이 커진다.윤이 나는 듯 보이는 구간에서 슬리피지는 늘 얇은 티끌처럼 손익에 박힌다. 그 티끌이 점수에서는 돌멩이가 된다.
반대편 두 줄, 장만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제한가 문턱까지 올라온 종목의 아래칸에 얇게 대기 주문을 쌓았다 지우고, 다시 쌓았다. 물을 마시는 속도로 ‘씹어 삼키는’ 체결을 이어가자 그의 스코어 막대는 느리지만 잇달아 길어졌다. 보유시간 48초, 슬리피지 0.04틱. 전광장은 빠른 사람을 바라보지만, 규칙은 오래 들고 있는 사람에게 미소를 준다.
“속보!”
뉴스 섹션에서 윤보현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바이오 규제 완화 검토, 보도자료 임박.” 그의 커서는 이미 해당 종목 위. 첫 체결에서 1.8%가 튀었다. 그의 막대가 즉시 자랐다가 곧 반 토막이 났다. 보유 4초, 슬리피지 0.27틱. 번개는 빛나지만, 번개는 맞으면 아프다. 보현은 어금니로 한쪽 볼을 지그시 눌렀다. 과신은 재능의 형제지만, 종종 재능보다 키가 크다.
조용한 구석, 마석준의 창엔 숫자만 있었다. 캔들은 흐리고, 표준편차와 체결강도 분포가 더 또렷했다. 그는 추세를 믿지 않는다. 오차를 믿는다. 매수·매도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은 박자감이 아니라 metronome에 가까웠다. 수익선은 완만했고, 점수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올라갔다.
나는 내 자리에서 틱 리듬을 들었다. 파도전은 쫓지 않고 붙들어 매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두 틱이 나오자마자 절반을 정리하고, 나머지를 브레이크이븐 위로 끌어올려 잠갔다. 잔량이 내게서 멀어지려 할 때마다 1틱 아래로 살짝 내려 다시 고정했다. 점수 창이 아주 조금, 그러나 또렷하게 올라갔다. 손우석의 곡선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의 선은 흥분이란 단어를 모르는 심전도처럼 잔잔했다.
라운드 종료 2분 전.
메인 스크린 상단의 익명 계정 #31이 다시 1위를 찍었다. 체결 로그를 열어보니 0.29초, 0.31초, 0.30초—이상하리만큼 매끈한 호흡. 인간의 손이라 보기엔 너무 일정하고, 기계라 보기엔 곳곳에서 의도된 엇박이 보였다. 경계 위의 호흡. 어제의 노트 위에 밑줄 그은 단어가 스스로 빛났다. 서명.
곽도영은 마지막 분에서 한 번 더 불꽃을 찾았다. 얕은 상단 호가를 밀어붙이는 순간, 장만호가 제한가 바로 밑 칸에서 대량 흡수를 터뜨렸다. 흐름이 뒤집혔다. 곽의 수익선이 ‘번쩍’ 솟았다가 그대로 ‘스윽’ 깎였다. 그는 깊은 숨을 삼키고 손을 거두었다. 수익 +, 점수 —. 숫자는 살았고 규칙은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예는 침묵했다.
호각. 라운드 종료.
잠깐의 정적 뒤에 랭킹이 떴다. 1위 #31, 2위 장만호, 3위 손우석, 4위 김유진. 곽도영은 상위권 끝자락, 윤보현은 중위의 중간, 마석준은 10위권 바깥에서 꾸준히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들은 스코어보다 자신의 감정을 먼저 확인했다. 스코어가 감정을 바꾸는 게 아니라, 감정이 스코어의 해석을 바꾸기 때문이다.
심판석 상단에 다음 라운드 알림이 떴다.
“예선 A-3, VI 라운드. 10분 후 시작.”
VI는 흔들리는 다리다. 다리 위에 서면 누구나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만큼, 떨어질 때 더 빨리 떨어진다.
휴식 10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때웠다.
곽도영은 의자의 높이를 한 칸 낮추며 중얼거렸다. “점수는 왜….”
우석은 자신의 손절 로그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자기와 화해하는 사람이 오래 남는다.
보현은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엎어놓고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더니, 알림을 모두 껐다. ‘속보 OFF’—그에게는 큰 결단이었다.
장만호는 종이컵 물을 천천히 마셨다. 그의 목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마석준은 숫자 칸의 소수점 자리수를 한 자리 늘렸다. 그에게 세계는 늘 조금 더 미세했다.
그리고 맨 뒤줄, 기둥 그림자에 걸쳐 앉은 누군가가 있었다. 얼굴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체결창에서는 미세한 지그재그 노이즈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초가전 막판의 #11을 떠올렸다. 0.03초 간격의 흔적, 그 뒤를 정확히 0.03초 늦춰 밟던 반대편의 그림자.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아는 자들. 이름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름이 없어도 서명은 남는다.
나는 노트를 펼쳐 빈 줄에 적었다.
“파도는 타는 것이 아니라, 파도 사이의 고요를 산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더 짧은 문장.
“다음 라운드—흔들림에서 서명은 더 굵어진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벽을 탔다. “참가자 여러분, VI 라운드는 발동·해제 구간의 페이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허수벽·통정 신호 적발 시 즉시 실격입니다.”
허수벽. 규칙이 가장 미워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시장은 늘 규칙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종종 반칙처럼 보인다.
나는 모니터 밝기를 한 칸 낮추었다. 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손목을 한 번 돌리고, 단축키를 점검했다. 매수·매도, 분할, 전량, 즉시취소, 지정↔시장 전환. 손끝이 낡은 악기처럼 건반을 튕겼다. 손은 기억한다. 잃었던 날의 떨림, 이겼던 날의 무관심. 무관심이야말로 시장이 가장 사랑하는 냄새. 그 냄새를 풍기면, 시장은 꼭 그 사람을 삼킨다.
카운트다운이 다시 켜졌다.
3, 2, 1—
VI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메인 스크린 상단, 익명 계정 #31의 로그가 0.03초보다 얇은 간격으로 반짝이며 솟구쳤다가, 같은 간격으로 역방향의 미세 체결이 바로 뒤에 겹치는 것을.
서명 위에 서명을 덧그리는 손.
서명 위에 국소 잡음을 덧칠해 해석을 어지럽히는 손.
둘 중 하나는 최백현, 다른 하나는 이도현일 것이다—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내 가슴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호가가 흔들렸다. 전광장 공기의 밀도가 잠깐 줄었다.
누군가 웃었고, 누군가 침을 삼켰다. 나는 숨을 짧게 잘랐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발을 가장 늦게 떼는 사람이 이긴다.
테이프 노트
점수는 속도의 상금이 아니라, 정밀의 영수증이다.
흔들릴수록 영수증의 글씨는 굵어진다.
용어 및 문장 해설
호가(Quote) 주식 거래에서 매수자와 매도자가 제시하는 가격. 예: 매수호가 10,000원 / 매도호가 10,010원. 호가창은 이 가격들이 계단처럼 쌓인 표를 말함.
슬리피지(Slippage) 주문을 넣은 가격과 실제 체결된 가격의 차이. 시장이 빠르게 움직일 때 자주 발생하며, ‘보이지 않는 손실’로 불림.
체결(Execution) 주문이 실제로 거래되어 매수·매도가 완료된 상태. 체결이 일어날 때마다 ‘체결음’이 울리며 거래가 이루어짐.
틱(Tick) 주가의 최소 단위 변동 폭. 예: 10,000원에서 한 틱 상승 → 10,050원.
브레이크이븐(Break-even) 손익이 0이 되는 지점. 손해도 이익도 없는 상태로, ‘본전가’라고도 부름.
MDD(Maximum Drawdown) 최대 낙폭. 일정 기간 중 최고점 대비 최저점의 손실률. 예: 최고점 대비 6% 하락하면 MDD -6%. 대회에서는 이 수치가 크면 탈락 기준으로 작동함.
프로그램 매매(Program Trading)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매수·매도를 수행하는 거래 방식. 기관 투자자들이 주로 사용하며, 대량 주문이 순식간에 체결됨.
순매수(Net Buying) 매수량에서 매도량을 뺀 수치. 양수면 ‘매수세가 강함’을 뜻함.
통정거래(Prearranged Trade) 둘 이상의 참가자가 미리 짜고 사고파는 불공정 거래. 대회에서는 즉시 실격 사유.
허수벽(Fake Wall) 실제 거래 의사 없이 심리전을 위해 걸어둔 대량 호가. 매수세/매도세를 유인하거나 속이기 위한 전술.
VI(Volatility Interruption, 변동성 완화장치) 주가가 단기간 급등락할 때 거래를 일시 중단시키는 제도. ‘발동’과 ‘해제’ 구간 모두 매매 전략의 핵심 타이밍이 됨.
슬리피지 패널티(Slippage Penalty) 대회 규칙상, 체결 가격이 원래 의도한 가격보다 멀어질수록 점수를 차감하는 제도. 빠르지만 부정확한 거래를 억제하기 위한 장치.
테이프 리딩(Tape Reading) 호가창과 체결 로그를 읽으며 실시간 수급을 분석하는 기법. 예전 증권거래소 시절 ‘틱 데이터’를 종이 테이프에 출력하던 것에서 유래함.
1. “슬리피지 평균 0.18틱, 평균 보유 9초.”
슬리피지(Slippage) : 주문을 넣은 가격과 실제 체결된 가격의 차이.
예를 들어 “10,000원에 사고 싶다”고 주문했는데 시장이 빠르게 움직여서 “10,050원에 체결”되면 슬리피지 50원 발생.
평균 보유 9초 : 한 번 매수한 주식을 9초만 들고 있다가 팔았다는 뜻.
→ 즉, 너무 짧게 들고 너무 급하게 거래한 결과, 수익보다 손실(슬리피지)이 커졌다는 장면
2. “수급선”
시장 전체에서 매수세와 매도세의 균형을 시각화한 선 그래프.
선이 위로 올라가면 매수세(사는 힘) 가 강함.
선이 아래로 내려가면 매도세(파는 힘) 가 강함.
유진은 이 ‘수급선’을 보면서 프로그램 매매가 어느 방향으로 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중
3. “프로그램 순매수가 강할 때일수록 추격 체결의 마찰이 커진다.”
프로그램 순매수 : 기관이나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대량 매수를 하는 상황.
추격 체결 : 이미 오르는 주식을 뒤늦게 쫓아가면서 사는 거래.
마찰이 커진다 : 그만큼 거래가 비효율적이 되어, 의도보다 불리한 가격에 체결(슬리피지 증가).
→ 즉, “기관이 사니까 나도 따라 사자”는 단타는, 빠르게 체결되지만 점수(효율)는 떨어진다는 뜻
4. “보유시간 48초, 슬리피지 0.04틱.”
보유시간 : 주식을 산 후 팔기까지의 시간.
틱(Tick) : 주가가 움직일 수 있는 최소 단위.
예를 들어 10,000원 → 10,050원 = 1틱 상승.
슬리피지 0.04틱 : 거의 완벽한 체결 효율을 의미.
→ 즉, 장만호는 느리게 거래했지만 매우 정밀하게 체결했다는 뜻이야.
5. “그의 커서는 이미 해당 종목 위. 첫 체결에서 1.8%가 튀었다.”
커서가 종목 위에 있다 : 보현이 이미 매수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
1.8%가 튀었다 : 첫 거래 체결만으로 주가가 1.8% 급등했다는 말.
→ 뉴스가 발표되자마자 ‘속보’에 반응해 순식간에 가격이 뛴 상황
6. “그는 추세를 믿지 않는다. 오차를 믿는다.”
추세(Trend) : 주가의 방향성. 상승세, 하락세 같은 흐름.
오차(Error) : 실제 가격이 이론적 평균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가를 뜻함.
→ 즉, 마석준은 인간 심리나 흐름(감정적 추세)을 믿지 않고, 통계적 편차(수학적 확률) 를 믿는 ‘퀀트형’ 트레이더라는 뜻
7. “파도전은 쫓지 않고 붙들어 매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쫓는다” = 오르는 주식을 따라잡는 공격적 매매.
“붙들어 맨다” = 움직임을 통제하며 손실을 제한하는 방어적 매매.
→ 프로그램 매매가 빠르게 움직이는 구간에서는 무조건 쫓기보다, 내 포지션을 고정해 시장의 흐름을 ‘견디는’ 전략이 낫다는 의미
8. “두 틱이 나오자마자 절반을 정리하고, 나머지를 브레이크이븐 위로 끌어올려 잠갔다.”
두 틱이 나오자마자 절반 정리 : 가격이 두 단위 오르면 절반을 매도해 수익을 확정.
브레이크이븐(Break-even) : 손익이 0이 되는 지점.
잠갔다 : 그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팔리도록 지정가를 올려 잠근 것.
→ “절반은 이익 실현, 절반은 본전가 위로 보호해둔다”는 리스크 관리 매매야.
9. “잔량이 내게서 멀어지려 할 때마다 1틱 아래로 살짝 내려 다시 고정했다.”
잔량 : 아직 팔지 않은 남은 주식 수량.
주가가 내려오려 하면, 손실을 줄이기 위해 방어 주문을 한 틱 아래로 재조정했다는 뜻.
→ 매우 세밀한 호흡 조절형 매매를 묘사한 문장.
10. “발동·해제 구간의 페이크에 유의”
발동/해제 : 변동성 완화장치(VI)가 작동하거나 해제될 때의 시점.
페이크(Fake) : 의도적으로 가짜 움직임을 만들어내 상대를 속이는 주문.
→ VI 구간에서 “상한가 간다!”는 착각을 유도하는 심리전에 주의하라는 뜻.
11. “통정신호”
통정거래 : 미리 짜고 사고파는 불공정 거래.
통정신호 : 그런 공모를 위해 미리 정해둔 암호 같은 체결 패턴(예: 1틱-1틱-2틱 반복 등).
→ 대회에서는 이런 패턴이 감지되면 즉시 실격 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