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90
"Now We are free. I will see you again... but not yet. Not yet." (-영화 Gladiator 마지막 대사中에서-)
또 다른 한 해가 오고 이윽고 한 달이 지나갔다. 본래의 일상에 되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현재 편안함에 대한 혼란함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止安, 知安, 持安, 誌安 등등 그러나 본래의 지안(至安)에 대한 자문에 대한 자답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마지막 대사를 인용해 보니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충전의 시간 동안 감정의 전달을 알았고, 자기 수용을 알았고, 편안함을 알았다. 결국 계획과 실행은 일상의 충돌과 부딪힘 그리고 살벌한 삶의 터전에서 또다시 전개되면서 인간은 살아지며 행동하기 마련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결국 본래 달라진 것 없는 현실에 각자의 태도에 충실히 적응할 수밖에는.
자기 수용 90%가 과연 10%의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의 끈을 압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정량(수량)적 의미가 꼭 정성(성질)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기에 그래서 글래디에이터 마지막대사가 그러한 이유인가 보다. 사물의 명확함은 논리와 수학적 계산에 어울리듯 글과 감정은 은유적 불명확함이 더 어울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의 생활은 명명백백 거슬릴 수 없는 신념과 신뢰 그리고 번복을 치욕스럽게 여기는 일직선상의 이분법적인 상념에 가까웠다면 거기서 채워지지 않는 메마른 틈을 글과 책의 불명확한 감정의 선에 도달하는 방법을 희구하였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내버려져 있고 하루 그리고 한 달, 한해 그렇게 지나갈 뿐이다. 의지와 선택은 자아의 몫이다. 이러한 현실적 자각은 지극히 타당하고 정상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 부가되는 운과 인연은 삶의 버팀목이 된다. 결국 한쪽으로만 진행될 수 없는 양쪽의 양립적 행진이 인생인듯하다.
제대로 쉬는 법,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잘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본연의 나의 각진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원형으로 만들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들 무엇이 달라질 것도 없다. 그것은 긍정도 행복도 본질의 가르침도 아니다. 그렇게 살아서도 안되고 살 수도 없다.
정량이 정성적 면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비율적 사고의 효율성은 대변한다. 일단 그렇게 가보자. 90%의 나로서 그리고 10%의 Not yet. 그렇다고 10을 90 속에 편입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기 때문에 안된다. 그건 명확한 부분의 일환으로 치환될 여분은 남겨놔야 한다.
영화대사로 시작한 글이라서 영화로서 비유한다면 '뷰티풀 마인드'처럼 같이 동행하거나, '올드보이'처럼 궁금함을 갈구하다 처절하게 모두 복수되거나, '쇼생크의 탈출'처럼 자기 수용의 결과로 희망과 자유를 얻거나, '신세계'의 엉터리 같은 세상에 저항하다 영영 등 돌리고 돌아서는 배신과 같은 여러 가지 엔딩이 존재한다.
10은 평생 못 채울 수도 있으나 순간 인위적으로 허위적으로 채울 수도 없다. 그냥 90 대 10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제 자유를 쟁취하였느냐? 이제 편안함에 이르렀느냐? Movere의 움직임의 동기는 여전히 지속적이냐? 여러 물음 속에 나는 대답한다. '두려움은 없어졌다. 그러나... 그닥'
'그닥!'이란 정성적 의미가 10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90을 의미하는 말일수도 있고, 정량적으로 10을 의미하는 말일수도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명명백백하지 않다고 해서 헷갈릴 이유는 없다. 다시 자문하여 본다. Movere! 지안(至安)에 이르렀나?
'Not Yet... But.'
- 2024년 2월 1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