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의 돌을 닫기만 하면 그것으로 얘기는 끝나. 나카타 상이 말한 것처럼, 한 번 연 것은 다시 닫아야만 하니까. 그것이 규칙이거든' (해변의 카프카中에서)
제목에서부터 작명까지 메타포로 이중삼중 칭칭 감겨있는 전체 스토리를 분석하기에는 벅찬 하루키의 긴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그래도 다행히도 비교적 무리 없이 읽었다. 해석이 방대해서 서평들은 각기 자기 분야에만 두루뭉술하게 해석된 글이 범람한다.
결국 나 자신도 하나의 관점에 집중해서 글을 시작해 본다. 그 관점이란 '시작과 끝'이다. 시종(始終)의 메타포는 '입구의 돌'로 매겨져 있고 투 트랙으로 분리된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나카타 상'과 '호시노 상'이 이 돌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담담히 엮어내고 있다.
이 소설의 관점은 우선 틀을 벗어나 새로이 태어남과 그 '시작과 끝'을 여러 경계의 선으로 작가 하루키는 제공한다. 그중 가장 난해한 경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인데 여기서 허무맹랑함으로 흐르지 않게 등장인물의 스토리를 조율하지만 다소 지겹게 읽히기도 한다.
'시작과 끝'은 여러 소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주제이다. 그 주제는 깨어있는 연속성의 자아의 발견과 그 과정을 통해 새로이 끝을 맺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 단순성을 구현하기 위해 하루키는 이 고전적 소설에 역량을 쏟아부은 듯하다.
한번 연 것은 다시 닫아야 한다는 시종(始終)의 강박은 결국 '다무라 카프카'의 깨달음의 자각으로 자연스럽게 투 트랙에서 원 트랙으로 전환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인용적 스토리는 전체 맥락에서 '시작과 끝'의 전형적인 스토리의 합체인 듯하다.
끝은 역시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무라 카프카'는 사쿠라 상, 사에키 상, 그리고 다무라 고이치 상의 가족 같으면서 아닌듯한 시공간을 초월한 경계의 선에서 홀로 상념 속에서 현실을 찾아가는 방황의 그 끝을 오시마 상과의 다음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는 메타포야, 다무라 카프카 군. 하지만 나에게나 너에게나 이 도서관만은 아무런 메타포도 아니야. 이 도서관은 어디까지나 이 도서관이지. 나와 너 사이에서 그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의 선에서도 현실은 존재한다. 소설 속 착각과 현실의 경계가 도서관이다. 그곳(도서관)은 사실이고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이상 갇혀있지 말라는 의미에서 도서관은 현실의 존재로 직립한다.
가짜는 진짜 속에서 구별되고 판별되는 것이다. 가짜와 진짜를 일컫는 그 명사 속의 국한되고 내재된 뜻에서만 함유되고 매몰되는 의미이다. 매몰감의 극복은 그 분명한 매개체의 끝이며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 '시작과 끝'은 진짜 현실의 도서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이 가짜일 수도 있고 벌어지는 현상이 진짜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알속에서 탈피하는 속 깊은 의미, 즉 자각은 나 자신만의 진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진짜이고 벌어지는 가짜를 판별하여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시작도 없고 영원한 끝도 없다. 또한 영원한 과정도 없다. 그러므로 '시작과 끝'은 명백히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은 행복의 기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이 있어야만 새로운 시작이 시작되고 과정이 종료되어야만 영원한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하루키는 그 난해한 관념을 소설의 스토리로써 구현하며 독자는 각자 개별적인 존재로서 그 난해함을 풀어 새로이 책 속에서 탈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갇혀있지 말라는 '시작과 끝'의 메타포를 갇혀있는 책 속에서 갇혀있는 등장인물로 풀어가는 그리고 마침내 그 해방을 작가는 아이러니함으로 풀어내고 있다.
진짜는 독자가 풀어야 한다. 반드시 그 배경에는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삶의 깨침이란 것을 여러 글 속에서 접하게 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전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이제 반복된 과정은 끝을 마치고 새로이 일상의 여정을 맞이하고 시작하고 싶다.
- 2023년 새로운 무더움이 시작되는, 그리고 끝도 보이는 7월 말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