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나무의 근간을 흔들지 않고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자신의 독특한 색깔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해 준 사제의 조화는 아름다운 음악의 루바토를 이루어 낸다. 음악의 루바토처럼 바둑의 루바토는 최근 개봉한 영화 '승부'에서 또 다른 사제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초를 강조한 돌격적인 바둑의 색채를 강요한 스승과 좌절할 듯 말 듯 그렇지만 결국 자신의 바둑을 이루어 낸 제자, 이 둘의 갈등과 그리고 화해, 서로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진 대결적 조화는 음악의 루바토를 완성시켜 주는 사제의 관계와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시간은 삶의 표준을 공정하고 편리한 기능으로 삶을 매력적으로 발전시켜주고 있다. 이제 정겹고 온기 어린 주문보다 키오스크가 편하고 현금보다 페이결제가 확실하고 문자보다 명명백백한 영상이 더 실용적이다. 그렇게 편리함에 길들여져 가고 또 거스르지 못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역사는 법치 속에서 덕치를 추구했고 현재 또한 명확한 성문법체계에서 애매모한 불문법으로 상호보완케 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 그 본연의 구성은 예상치 못한 가변적 변수에 능동적으로 자기 보완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로써 그 결함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엔 기계적인 표준화의 한계 때문이다.
루바토는 조화와 균형을 부여하는데서 도래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경제발전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야기했고 부패의 악순환 속 디지털의 혁명과 뉴세대의 선호가 매치되어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의식과 관행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렇지만 삶의 루바토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대 명제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순히 융통성만 부리는 기교만이 루바토인가? 루바토의 정량적인 의미 즉 원리원칙의 경직되고 완충성의 부족 또는 과잉 즉 양적인 면 보다 같은 루바토라도 성질의 본질적인 면을 세밀히 이해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루바도의 근간은 자기만의 주체성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영화 '승부'에서 돌출되는 갈등의 본질은 자기만의 바둑을 두는데서 비롯된 충돌이다. 같은 바둑이지만 스타일이 정말 다른 것이다. 사제는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선의의 라이벌로 서로의 성장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방책으로 같이 할 수는 없을 때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한다.
루바토를 인정하는 같은 대전제지만 루바토의 성질적 방식에 이견을 달리하는 것은 루바토 방식마저 획일화할 수 없는 그 바탕적 성질이 바로 삶의 루바토인 것이다. OWN 즉 자기의 주체성은 견고할 수 있어서 그 부드러운 루바토는 오히려 강한 강직함에서 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루바토는 선의를 바탕으로 한다. 기계적인 명백한 데이터를 조작하고 속이고 만들어 낸 과거 황우석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감을 부여했다. 과거 배반이나 변절이라는 단어보다 자기 상실이란 단어를 쓴 이유가 바로 OWN, 자기 주체성의 중요함을 강조함인데 상실은 그 주체의 상실이다.
그 중요함은 삶의 기초에서 비롯되는데 그 근간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음악과 바둑의 사제처럼 서로 한 번 신뢰해 보고 맡겨놓아야 삶의 루바토는 완성된다. 잘 짜인 시나리오에 맞게 피아노를 치거나 바둑을 둔다면 루바토는 기대하기 힘들다.
연필보다는 정겹지 않지만 지울 수 없는 볼펜보다는 덜 기계적인 샤프의 샤프심을 바닥에 흐트러져 놓으면 다 규격에 맞을 것 같지만 아주 세밀하게 다 다르다. B,2B, HB, F, H,2H,3H 모두 사이즈가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루바토도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고 사용해 보면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다.
연필보다 편리하지만 볼펜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중간적 매체인 샤프도 기술적으로 발전하여 정밀한 샤프의 기능으로 사이즈 선택을 해줘야만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진한 심인지 덜 진한 심인 지는 샤프심을 고를 때 골라야 된다. 샤프와 샤프심 그 쓰임에 따라 다양한 색과 사이즈를 골라야 한다.
볼펜이나 연필처럼 가변적 요소가 덜한 선택이 루바토의 양적 구분이라면 사프와 샤프심은 루바토의 성질적 구별이라 비유된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샤프심은 애당초 쓰질 못하고 쓰지를 못하면 그 아까운 글이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다.
관계 또한 섣불리 별무리 없이 잘 맞겠지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샤프와 샤프심처럼 안 맞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자기만의 루바토의 방식이 있는데 조작하거나 강요하거나 채찍질하듯이 주변을 억지스럽게 만든다면 음악의 아름다운 루바토나 신의 경지에 이르는 바둑의 신은 탄생하지 못한다. 또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당사자의 루바토와 동시에 응원하고 간절히 바라는 주변인 또한 삶의 주체성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들은 또 다른 곡해석을 위해 오늘도 자신만의 루바토를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문학인들은 작품의 루바토를 위해 계속 전진한다. 이처럼 삶의 루바토는 자연스러운 새하얀 백지위에 샤프의 사이즈와 색감을 선택하는데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역할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믿고 맡기는 신뢰가 진정한 사제의 관계에서 루바토를 탄생시키게 되듯이 루바토는 예술적 삶에만 추구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 보편적 삶에서도 얼마든지 재탄생하는 미완성을 되새겨주는 삶의 미학이며 꼭 필요한 것이다.
남들의 시선,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게 맞는 사이즈와 색감처럼 관계나 대상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OWN은 자신만이 안다. 머릿속에 있는 내가 불편해하는 관계, 내가 편안해하는 대상 그 모든 것이 나의 루바토의 근간이지 남의 머릿속의 구상은 헛것이다.
삶의 루바토는 짜인 게 아니고 그렇게 각자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잘 맞는지는 늦게 알아차리지만 잘 안 맞는 것은 금방 알아차린다. 오직 본인만 안다. 그래서 맞춰주면서 조금씩 조금씩 잘 어울리게 한다. 짜인 루바토는 자신을 루바토에 맞추어야 하니 모방이고 가짜이니 불편한 것이 된다.
십오 년 이상 헤어져 있다 다시 모이기 시작한 모임이 불편하지 않듯이 현재 별 무리 없이 모여있지만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언젠간 헤어져야 할 현재 인연들도 지나가는 삶의 하나의 흔적이다. 루바토는 그런 흔적들이 모여 새로운 것을 형성하게 해 준다. 자신의 주체성과 타인과의 신뢰의 루바토만이 삶을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연필로 쓰기'중에서, 김훈)
- 2025년 4월 10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