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신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칼의 노래- 칼의 울음 中>
위로란 본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하소연이나 넋두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습관적 반복의 군더더기 변명 또한 칼의 노래엔 없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시 세상 속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칼의 노래를 이번엔 끊지 않고 한자리에서 연속적으로 읽었다. 재미있었다. 재미란 단어는 단순히 흥미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순신은 무정치적인 인간이긴보단 탈정치적, 비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치적인 싸움의 거리를 두었으나 그는 정치적으로 나라가 아닌 임금에게 희생되기도 했고 살아나기도 했다.
그는 희생에는 무덤덤하나, 살아난 점은 치욕으로 느끼는 듯 보인다. 칼의 노래 근간이 된 난중일기에서도 일어나는 현상 즉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이순신답지 않게 집요하게 원균에 대한 독설과 부정적인 견해 즉 의견을 피력한다.
사실과 의견, 이순신은 사람이다. 하소연이나 위로에 의존치 않은 꿋꿋한 장수의 모습에서도 사람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불편한 침묵이 교차한다. 읽고 나서 물으나 마나 한 물음이 생긴다. 칼의 노래 책은 성웅 이순인 우화 책이 아니다.
도대체 이순신은 왜 싸운 걸까? 아니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왜 싸움을 멈추지 않았을까? 작가는 몸으로 하는 싸움에 칼의 울음을 통하여 이순신이 싸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왜 계속 싸우고 있는지는 표현하고 있지 않다. 좌절을 느끼면서도 밥을 위해 싸우고.. 내가 싫어하고 부정하고 인정하는 것은, 개별적인 싸움이고 왜 싸워야 하는지 답이 있다.
칼의 노래 속 죽음과 칼, 그리고 미움 이 모든 것이 개별적이지만 칼의 울음에서 싸움만은 그는 개별적인 싸움을 한 것 같지가 않다. 혹시 알까, 왜 싸웠는지 알면 체념의 빈자리가 채워질지... 깊이와의 관계가 없는 각자 현실의 아픔이 채워질지... 칼의 노래는 칼의 울음이다.
-2014.08.07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