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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풍경과 상처

by movere

벚꽃 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벚꽃 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중략)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 만유 혼음의 그리움이 인간의 종과 속을 거쳐서 한 여자에게로 와닿는 여정(旅程)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계통발생의 여정만큼이나 장구하고도 외로운 것이리라.


그러고 또 말하건대, 인간의 여자에게로 향하는 그 여정에서 짐승의 호롱불 같은 만유 관능을 떨쳐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챙겨서 거느리고 우리는 가는 것이리라. (P11~12) <풍경과 상처 중에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꽃잎 쏟아져내리는 벚나무 밑에서 작가는 나무에 기대앉아서 풍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연사의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문명사는 개똥이다라는 허무적이다 못해 매몰적인 강한 어조로 풍경을 쓰고 있습니다.


연필과 지우개란 생성과 소멸의 상반적 사물로서 그의 문명사 멸절의 조급한 욕망적 표현은,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아날로그적 보수의 습성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쓴, 쓰고 있는, 그리고 쓸 작품적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디지털의 거부, 즉 아날로그의 고수는 가히 착각을 들게 할 만큼 신앙적입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또한 문명사의 일부분이라 지우개로 뭉개도 흔적은 남는 법... 추측 건데 작가가 디지털을 수용한 입장이라면 작가는 그 흔적조차 거리 적하는 습성과 조급함에 그 농락당한 문명사의 기억의 멸절 방식은 문명사를 포맷하고 하드디스크를 과감하게 부숴 버린 후 새로움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문명의 더러운 때가 없을 때로의 귀환, 그러한 풍경의 그리움은 자연사의 자연스러움에 귀결합니다. 종과 속의 구분 이전에 만유의 원초적인 그리움으로 새로 시작하는 자연사 속에서 문명과 교육에 의해서가 아닌 종족의 유전자로만 구성된 여자의 접근으로 사랑이란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결국 그에게 새롭게 찾아온 힘 "사랑"은 문명사의 멸절에서 만유 관능을 떨쳐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안고 가는 것이라 또 말하고 있으며, 문명을 제거함으로써 가려는 것과 문명을 통해서 가려는 그 나란함의 비극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 비극이라 작가 특유의 허무적 결론으로 글을 맺습니다.


그러나 그 허무적 나란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과정의 상처를 회상하며 그 상처의 사유 본원 지는 봄날의 흩날리는 꽃잎의 풍경이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다시 작가는 잠시 세워둔 자전거를 다시 타고 기나긴 여정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래 그래도 가야 하는 것이 삶이니까, 풍경에 속해진 상처 또한 그것들을 모두 챙겨서 가야 하는 게 삶이므로....


얼마 전 명구절에 읽은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연상케 합니다. 중장비로 파괴한 원죄를 벗어나려 주인공은 불을 끄는, 아니 문명을 소제하는 소방 관로 전업을 하여, 불, 즉 문명의 근원지만을 집착하여 아주 절멸, 소제해 버리려다 주인공은 그 문명의 불에 의해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작가가 말하는 나란함은 소통되지 않는 비극이자 동시에, 소통하지 않는 비극이며, 어쩔 수 없는 개별성의 비극입니다.


서해의 일몰을 보았습니다. 낙조의 풍경은, 떨어지는 태양의 아픔과 , 아픔을 받아들이는 포근함의 바다의 조합으로 나란함을 유지합니다. 세상 이치를 알면 세상과 협상하는 법도 절로 터득한 다지만, 그 또한 각자의 개별성의 몫입니다.

그 낙조의 풍경 속에 개별성을 지닌 자신은, 태양이 될지 바다가 될지 그 또한 삶의 나란함의 연속이자 선택일 것입니다. 가을날 선감도의 일몰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일 것입니다.


-2013.10.17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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