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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Feb 08. 2019

눈 사람의 골든아워

업무가 합(合)과 반합(反合)이 분명하고, 대칭점을 찾지 못할 때, 대개 업무는 사무적인 절차를 밟게 된다.

공무원을 안 해봐서 아니 못해봐서 모르겠지만 공직의 관료주의처럼 대민담당 공무원과 민원인의 관계로 점철하여, 결과가 아닌 과정 자체가 업무로 대체되어 무마되어 사라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해결되거나, 영구 미해결의 함의(含意)로 재탄생되어 더 이상 거론해도 무의미해지는 여러 갈래의 결과로 나뉜다.

일이란 유사한 경우가 반복되는 법이다. 그래서 나뉘는 결과 즉 미래에 익숙해지며,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감정이입 없이 나 자신이 중립에서 적당해지게 된다.


정초 음력 설날 무렵 민원이 발생했다. 제삼자 간의 분쟁에서 분쟁지역 즉 업무 관할이 명확이 우리일 경우 중재하게 된다. 그것을 굳이 달리 부를 방법이 없어 민원이라 표현했다

메인 배관의 분출이 하필 옆 부서 출입구에 위치하다 보니 분출되는 소음이 시끄러워 우리의 영역 즉 관리 조작권이 있는 우리에게 닫아달라는 민원이다. 민원이란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열고 닫는 조작권이 유예되어 잠시 옆 부서로 넘어가는 경우, 우리 것이지만 잠시 동안 우리 것이 아닌 게 된다. 조작권이 우리 것이지만 잠시 옆 부서로 넘어갔으니 그쪽에서 문의해 봐라 것이 전형적인 공무원 응대식 과정이고 아님 알았으니 그쪽에 어필한 후 다시 전달하겠다 식이 중재하겠다는 응대식인데 이나저나 잘해도 본전인 업무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일단 접수했고 우리의 조작권을 잠시 가져간 곳에 전화해서 상황이 이러하니 열어놓고 운영하는 이유는 이해하겠으나, 옆 부서에서 소음으로 업무가 어렵다고 전달했다. 근데 통화의 당사자 대부분 그 당시의 당사자일 뿐 이 애매함의 완전한 장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 이 또한 공무원 식으로 대략 응대하기 마련이다. 제가 결정할 부분은 아니고요 위에 보고하겠습니다 아니면 뭐 어쩌겠냐 또는 화를 내거나 뭐 이런 식으로 대답을 받는데, 그날은 달랐다.


조작권을 유예하여 그 부서가 가져갈 정도라면 업무에 트러블이 있다는 뜻이고 그 부서의 업무 스트레스가 잔존하기에 전화상의 통화로 좋은 말로 응대하긴 어려울 건데, 분쟁의 장본인도 아니고 그저 휴일 업무를 보다 민원의 전화를 받는 그는, 조목조목 친절하게 자기의 의견을 물었다. 시끄러운 상황은 이해되나 어디까지나 위치가 밖에 위치하고 있고 내부로 소음이 흘러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분출의 소음을 차단만 하기 위해 닫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는 주장을 예의 있게 피력하고 상황은 절차를 밟아 전달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현장의 시끄러움을 피해 차량 속에 유선으로 이어진 통화가 마친 후 난 잠시 몇 초 동안 멍해졌다.

멍해지는 이유를 당시 몰랐다. 모르는 사람에게 냉정한 밥벌이터에서 정초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에

감복을 한 것인지 아님 내가 예상한 것에서 벗어나 잘 협조해줘서 그런 것인지?

멍함을 뒤로하고 다시 민원을 제기한 부서에 전화를 하여 이러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또 다른 그는 내게 물었다. 닫지 않고 시끄러움을 감수하고 가면 그쪽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내가 대답할 영역은 아니고 단지 상황을 전달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대답할 영역이 아닐뿐더러 그리고 그쪽 상황도 모른다.


그렇다고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또 다른 그에게 논쟁을 따지는 것은 싸움을 걸겠다는 절차이지 중재하겠는 자세는 아니다. 공무원처럼 생각하긴 싫으나 공무원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는 절차가 넌 너리 났다

지극히 상식적인 대화가 업무적인 가면을 쓰면 지극히 비상적인 대화가 된다.

관료주의를 배척하는 주의라도 중재의 주체로 놓이게 되면 공무원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크고 지극히 자본주의 시장원칙에 놓인 민간 대규모 사업장이 더 관료적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 뒤에 이어진 그 멍한 상태는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울림이었다.

감정의 울림, 말의 울림.

친절한 목소리, 비정하지 않은 논리, 그 파장이 잔잔한 울림을 가져왔지 않나 생각한다.

어쩜 우리는 이러한 파장을 잊고 지내고 사는지 모른다. 아니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강의 '작별'소설 속에 나오는 눈사람처럼 온기와 체온을 느끼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두려움 속에

냉랭하게 자기의 존재를 녹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차갑게 살아가고 있진 않는가?


"특정한 오너가 없는 대부분의 공조직이나 학교와 같은 조직에서 업무를 추진하거나 정책방향을 밀어붙일 때는

그 추진력의 해당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열정'에서 나오며, 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정책결정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완성된다"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에 나오는 구절이다. 골든아워 속 이교수는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국제 표준에 맞는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되진 않을 것이고 이교수 또한 생존과 사투하는 환자처럼 처절한 절망과 사투해야 하는 의사의 소명감이 그를 외롭게 했을 것이다.

급박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에어 엠뷸런스를 정부가 아닌 의료인이 직접 확보하고 비용을 임시 서명해서

극한 상황의 책임까지 떠안으면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정부 행정주의의 답답함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소박함이란 답답함과의 거리를 두는 단어이다.

상식이란 거래의 대상과도 거리가 먼 그저 평범한 삶의 태도일 뿐이다.

눈사람은 과연 언제쯤 따뜻하게 내민 손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모두가 정성과 동심으로 만든 눈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상식적이고 소박한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눈사람의 골든아워는 아직 유효한 것인지, 아님 이제 존재하지 않는 절망인 것인지?

그 울림이 머리로 간직하기에 부족해서 나를 글로 이끌었다.

입춘이라지만 아직 바람이 차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직장에서 인정받고, 여유가 생기면 동료들과 편히 술 한잔 기울일 수 있었다.

내가 삶에서 바란 것은 그 정도였다. 앞으로도 이만큼만 살았으면 싶었다." (골든아워 中 에서)


- 2019년 02월 04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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